여성의 ‘일관된 진술’ 하나로 결정되는 성범죄 판결
지난달 29일 대한민국 남성들이 만세를 불러야 할 날이다. “여성이 그렇다면 그런 거야”라는 인류 문명사의 정의 원칙을 짓밟아 버린 ‘특수 한국적 정의론’이 마침내 도전을 받게 됐기 때문이다.
그동안 ‘진술의 일관성만 확보되면’ 거의 무조건 받아들여지던 여성의 주장이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음을 보여준 판결에 남성을 대표해서 감사를 드리는 바다. 아울러 대한민국의 사법 정의가 완전히 죽지는 않았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순간부터 대한민국 남성들을 공포의 도가니에 몰아넣었던 ‘미투’운동이 이 판결로 그 난폭함을 절제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것은 결코 정당한 ‘미투’ 마저 위축되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서지현 검사에 안태근 전 검사장(사진)의 행동은 마땅히 비난받을 행동이었으며 비록 무죄판결을 받았다고 해도 그가 저지른 성적 과오까지 면죄부를 받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한다. 아울러 권력을 이용해 성적인 가해를 비롯한 갖가지 갑질과 범죄행위가 근절돼야 한다는 점에 추호도 이의가 있을 수는 없다.
문제는 그것이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분석에 의한 판단을 넘어서 ‘마녀사냥’의 수준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서 검사가 자신의 피해를 호소했다는 이유로 인사상의 불이익을 실제로 받았는지는 사법부의 판단에 맡기겠다. 섣불리 필자가 가부를 논할 대상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적어도 이 판결이 무분별하게 여성의 ‘일관된 진술’에 의존해 온 상황에 반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 정도로 우리의 사법 정의는 여론 특히 과격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조성된 감정적인 반응에 의한 ‘사법 농단’을 감수했다고 생각한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유죄판결은 그러한 ‘사법 농단’의 대표적인 사례다. 모든 정황과 증언 증거가 안희정의 무죄를 증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법부는 김지은의 ‘일관된 진술’에만 의존해 한 정치가의 삶을 나락에 빠뜨리고 말았다.
김지은이 보낸 각종 메시지는 둘의 불륜관계를 보여주었고 ‘피해자다움’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그런 이의를 제기하는 것조차 2차 가해라는 이름으로 정죄하는 웃지 못할 일이 발생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언론의 자유는 보장되는 것이고 따라서 국민 모두가 사법부의 판결에 이의를 제기할 권리가 보장돼 있음에도 왜 성범죄에 대해서 예외를 인정하는 것인지 고민하게 하는 장면이었다.
성범죄혐의만으로도 사회적 매장 각오해야 하는 비정상적인 상황
누가 박원순을 죽였는가? 그가 비서를 성추행했는지의 진실 여부는 논하지 않겠다. 문제는 성범죄에 대한 수사와 기소 그리고 판결 과정에서 유무죄의 여부를 막론하고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이미 여론의 재판으로 만신창이가 돼 반쯤은 사회적으로 매장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병진은 대학생으로 가장한 호스티스에게 무고를 당해 여론의 뭇매를 맞았으나 무죄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그런 혐의를 받았다는 사실이 대스타 주병진에게 오늘까지 족쇄가 되고 있다.
이경영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무죄판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텔레비전 출연을 금지당하고 있다. 성범죄에 연루됐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무죄가 돼도 매장이 되거나 활동에 제한을 받는데 이는 아마 다른 범죄에서는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이용한 무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박시후와 이병헌을 노린 무고가 대표적 사례다. 박시후의 경우 50억원을 요구받았고 이병헌도 비슷한 협박에 시달렸다. 특히 이병헌의 경우 교묘한 함정까지 파서 혐의를 씌우려고 한 악질적 수법에 당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이병헌과 박시후는 그로 인해 여론의 공격을 당하고 있다. 이병헌의 아내 이민정마저 그러한 여론에 공격을 당하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2차 피해가 아닌가?
이러한 무고 행위는 비단 유명인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어떤 여성은 자신과 말다툼을 한 남성에 대한 보복으로 성폭행을 무고했다. 둘은 성관계는커녕 스킨십조차 변변히 없는 말 그대로 ‘아는 사이’였다. 이 정도면 여성이 바보가 아닌 이상 금방 자신의 무고가 들통날 것이라는 점을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무고를 행한 것은 성범죄에 연루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조리돌림을 당하기 쉬운 사회적 분위기를 이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성의 ‘일관된 진술’만으로 유죄판결을 내릴 수 있다는 점도 고려했을 것이다. ‘운이 좋으면’ 상대를 성범죄자라는 낙인을 찍어 사회생활에 막대한 지장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박원순의 죽음은 아마도 이러한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에 일어난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해 온 박원순은 성범죄자로 지목되는 순간 다가올 사태를 너무나도 잘 파악하고 있으며 결코 자신이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라는 점도 예측할 수 있었다.
비서와의 사적인 관계는 모두 진실이며 문제는 그것이 성추행인가 애정행각인지의 판단문제인데 김지은·안희정 사건은 좋은 판단재료가 됐을 것이다. 아무리 상호합의를 거쳤다고 해도 자신이 상급자인 이상 무죄가 되기 어렵고 설사 무죄판결을 받아도 그의 삶은 험난하기만 할 것임은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봐서 명백하니 그로서는 극단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편파적인 성범죄 대응이 가져온 문제들, 무너지는 사법정의
부안 상서중 송경진 교사의 극단적 선택은 이 사회가 얼마나 성범죄에 대해 편파적인가를 보여주는 사례다. 30년간 교직 생활 동안 학생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던 그는 하지만 아마 적도 많았던 것 같다. 어느 직장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일을 열심히 해 인정받는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자들은 있게 마련이다.
수업시간에 핸드폰 사용으로 질책을 받은 아이들을 꼬드겨 있지도 않은 성추행으로 신고하게 한 동료 교사의 모함은 그에게 돌아오지 못하는 길을 가게 했다. 심지어 학생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탄원서를 제출했지만, 그는 성범죄자로 몰려야 했다. 아니 그를 성범죄자라 몰아야 자신들에게 유리한 자들은 어떠한 증거도 정황도 필요 없었을지 모른다. ‘우리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라는 식이었다.
이것이 예를 들어 폭행이었다면 같은 식으로 교사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가 있었을까. 아마 100%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다. 처음 경찰 조사에서 이미 학생들은 진실을 고백한 상태였고 그로 인해 사건은 종결된 상태였다. 그런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마녀사냥이 시작된 것이다.
학생이 성추행을 주장하는 순간 피해자로 단정하고 교사는 가해 사실이 있는지 없는지 사실조사도 해보지 않고 가해자로 단정하고 학생이 교사를 무고해서 교권침해를 한 사건인지 파악도 안 해보고 그렇게 제 남편을 ‘나쁜 놈’을 만들었습니다.
그 많은 인권단체 정부 기관도 그와 아내의 호소를 외면하고 말았다. 폭행이라면 과연 그랬을까. 전혀 달랐을 것이다.
성범죄에 대한 이러한 편파성은 대한민국이 지켜야 할 많은 가치를 훼손했다. ‘무죄 추정’이라는 훌륭한 사법원칙도 성범죄에 대해서는 무기력하다. 일단 찍히면 그 순간부터 ‘유죄추정’이라는 독재정권 시절에나 통할 만행이 저질러진다.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 이번에는 ‘2차 가해’론이 등장해 강력한 규제를 한다. 이 정도면 독재정권 시절의 언론 탄압을 무색하게 할 수준이 아닐까. 독재정권 시절 민중은 독재의 횡포에 저항한 사람들을 옹호하고 지지했지만 지금 성범죄라고 낙인찍힌 인물의 억울한 사정을 이해하고 지지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용기를 가져야 할 행위가 되고 말았다.
성범죄를 감싸거나 덮으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공정한 수사와 기소 그리고 재판을 원할 뿐이다. 마녀사냥은 더 이상 존재해서는 안 되고 인민재판 여론재판도 사라져야 한다.
성범죄도 다른 범죄처럼 객관적인 증거와 정황 등이 충분히 고려돼 사법적 절차를 거쳐 결과가 나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단지 연루됐다는 것만으로 사회생활에 큰 지장이 생겨서도 안 될 것이다. 그것이 없던 ‘꽃뱀’도 양산(?)하게 된다는 점을 정녕 모른단 말인가?
어느 철없는 청소년이 저지른 무고가 한 청년 남성의 삶을 망친 사례를 소개하며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한다. 아이는 길에서 휴대폰을 주었다. 집을 나갔다가 돌아간 그 소녀는 자신이 휴대폰의 주인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로 인해 휴대폰 주인인 젊은 남성은 성폭행범으로 몰려 자신이 힘들여 얻었던 취업자리를 잃고 말았다.
‘신이 감춘’ 직장이라고 하는 대학 직원으로 내정된 그가 이 일로 내정취소를 당했다. 한 달 후에 그의 무고가 밝혀졌으나 대학 측은 다른 지원자를 합격시켰기 때문에 그를 거부했다. 명분은 그렇지만 아마 성범죄가 아닌 다른 범죄였어도 그렇게 했을지 의문이다. 필자라면 그 부모를 상대로 엄청난 액수의 민사소송을 일으켰을 텐데 그 청년이 어떤 대응을 했는지는 나와 있지 않았다.
비슷하면서 다른 케이스를 소개하자. 우리나라 여성이 미군과 성관계를 했다. 앞의 케이스와 달리 실제 성행위가 이루어진 경우다. 그런데 그 여성은 다음날 귀가 후 부모에게 추궁을 당하자 (가출 소녀와 비슷한 이유로) 미군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고 그로 인해 재판이 열렸다. 판결은 무죄. 하지만 미군은 직장을 잃지도 않았고 2차 피해도 없었다.
이것이 우리와 미국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미국은 성범죄를 비롯 모든 범죄에 대해 매우 엄한 처벌을 내리는 나라다. 살인·강간의 경우 아무리 미성년자라도 관용이 없다.
예전에 들은 사건의 경우 살인·강간으로 10대 소년에게 40년 징역을 내렸다. 그에 대해 방송은 “그의 인생은 끝났다”라고 보도했다. 10대가 40년 형을 살면 50대이니 틀린 말도 아니다. 우리가 미성년자라고 해서 터무니없는 양형을 하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하지만 그들은 성범죄라도 ‘무죄추정’의 원칙을 저버리지는 않는다. “10명의 진범을 놓치덜도 한 사람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라는 사법의 원칙도 준수하고 있다.
성범죄도 원칙대로 처리하는 것이 정의를 세우는 길
안태근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법무부 장관마저 곁에 있는데 술에 취해 서지현 검사에게 마수를 뻗은 것은 누가 봐도 잘못이다. 아무리 기억에 없다고 해도 한 것은 한 것이니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를 해야 했는데 그가 사죄한 대상이 잘못됐다.
서지현이 아니라 신에게 용서를 빌었으니 서지현은 영락없이 <밀양>의 전도연 신세가 되고 말았다. 왜 안태근은 서지현에게 사죄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용서를 빌었는가? 겁나서? 혹시 귀싸대기라도 맞을까 봐? 아니면 명색이 상관인데 체면 때문에?
하지만 사실관계는 분명히 가려져야 할 것이다. 적어도 무죄 추정의 원칙이나 성범죄에 대한 불합리한 언론통제와 피의자 인권에 대한 과도한 공격 ‘성범죄 의혹=매장’ 등 이러한 문제점은 우리가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다.
이번 무죄판결이 편파적인 성범죄 대응에 대한 견제로 작동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아울러 무분별한 미투가 사라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미투자체는 오히려 장려돼야 하지만 다른 의도를 가진 무고는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한다.
그래야 진정으로 피해를 호소하는 여성들이 ‘꽃뱀’ 취급당하지 않게 될 것이다. 적어도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부디 이번 판결을 계기로 이 사회가 ‘미투’에 대한 고민을 좀 더 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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