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드라마를 보거나 썸을 타는 지인을 마주한다. 애정 장면이 등장하고, 서로 교감하며 진행되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럴 때 생각한다. 녹음기는? 동영상 기록은? 행여 마음이 변하거나 뭐에 틀려 앙심을 품는다면 그들이 나눴던 감정과 행위들은 고스란히 일방의 범의와 범행으로 변한다. 과장하거나 아주 희소한 경우를 두고 그런 식의 비약을 하지 말라는 반문도 있을 법하다.
지하철 같은 공공장소에서 인파에 몰려 의도치 않게 여성 신체에 손이 닿으면 차라리 눈 꾹 감고 주먹을 날리라는 농반진반 이야기가 있다. 강제추행보다 폭행의 형량이 더 낮다는 판례가 뒤따른다. 강제가 아닌 정말 어쩔 수 없이 손이 닿게 된 연유를 설명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억울하고 무고해서 어렵게 선임한 변호사는 이렇게 이야기할지 모른다. 그의 법조 경험에 비춘다면 그편이 훨씬 간단하고 신속할 수 있기에.
무죄 주장으로 어렵게 가지 말고, 순순히 죄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가시죠. 무죄 주장하면 재판부는 개전의 정이 전혀 없다고 더 심하게 형량을 선고할 수 있습니다. 이편이 낫습니다.
죄의 유무와 증거, 사실 심리는 중요한 게 아닐지 모른다. 연유야 어찌 됐든 통절한 참회와 반성을 해야만 한다.
유튜브를 보다 보면 간혹 젊은 남자 논객이 상대 여성 논객과 청중에 맞서 압도적인 논리와 주장으로 토론을 벌이는 클립이 있다. 그날의 논제는 다양했다. 여성 임원 할당제, 남녀 고용 쿼터제, 동일 노동 동일 임금, 국방의무 불평등까지 이미 수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 첨예하게 남녀가 맞서는 의제들이다.
남성은 평등한 세상이 도래했으니 머리를 맞대고 더 나은 논의 구조와 대안을 만들어보자고 호소한다. 여성은 그런 세상은 부재하며 여전히 차별받고 고통스럽고 학대와 평등하지 않은 구조 속에 놓여있는 우리를 보라고 역설한다.
페미니즘이 우리 사회의 주류 담론으로 매김하고 그 영향력이 확산하는 사이 자주 보게 되는 풍경이다. 예능 프로그램의 편집방향, 웹툰의 집필 태도, 영화 소재의 적절성 판정은 물론 국가 예산 편성과 집행부터 정치 행위 일반에 이르기를 페미니즘이 끼치는 영향은 어마어마하다.
이화여대 이효재 여성학 교양과목 77년 시대부터 강단, 활동가 페미를 거쳐 2018년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인 영페미, 넷페미까지. 종횡으로 거대해지는 그들의 영향을 절감한다. 출판계에선 페미니즘 소재가 기획과 집필의 상수처럼 되어버렸다. 한국 소설에서도 지배담론으로 자리 잡았다.
이런 가운데 등장한 <페미니즘은 어떻게 괴물이 되었나>(이하 페어괴)가 서점가 판매 상위에 있다니 반갑고 기껍다. 책은 본격적이다. 에두르지 않고 정중앙을 때린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페미니즘의 오점과 한계를 정중히 그리고 집요하게 짚는다. 우선 이 대목에 눈이 갔다.
우리가 노동자를 지지하지만, 사회주의를 지지하지 않듯이, 페미니즘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여성인권과 양성평등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적어도 필자가 겪은 페미니스트들의 논리 제1순위는 늘 이거였다. 양성평등을 지지한다면서 왜 페미니즘을 지지하지 않냐. 잘 모를 적엔 저 물음에 입을 다물거나 답을 회피했지만, 양성평등과 페미니즘이 등식관계가 아님을 알게 된 이 책을 읽은 후엔 궁색해지지 않게 됐다.
양성평등과 여성인권을 지지한다면서 이 사회의 소외되고 피해받는 여성들과 연대하고 어깨 겯는데 이른바 여성계는 왜 무심했고 무시했는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소외된 피해 여성들을 정치적 이권이나 자신들의 재리(財利)를 위해 어떻게 이용하고 휘둘렀는지 책에서 마주할 수 있다.
또한 현재 남녀 사이가 어떻게 피 튀기는 대결 양상으로 대회전(大會戰) 되었는지, 그 뒤에서 조종하고 영향을 발휘하는 여성계의 흑막이 드러난다. 1장이 이 같은 총론과 현황을 이야기한다면,
2장은 대전지역 여성계의 실태를 다뤘다. 소위 성폭력 피해자 구제 기관이라 자처하는 단체들의 활동상과 비위는 보기 힘든 수준이었다. 단체에 이득이 된다면 피해자가 원치 않는데도 피해 사실까지 백일하에 드러내고 적극적으로 윤색, 각색까지 하는 모습이어서 소름 끼쳤다.
이런 자들이 자기 진영의 가해에는 관대하고 태산보다 무거운 입을 보여주는데 이 선택적 피해연대라는 위선은 이미 많은 국민이 간파했을 테고 더 내밀한 사연을 알고 싶다면 책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하의 이하를 보게 될 것이다.
3장에선 정의기억연대(구 정대협)이야기를 한다. 한국 사회에선 마치 지뢰같이 잘못 만지거나 다루면 가루가 되는 주제다. 치밀하고 철저하게 성역화되었고 이 성역 안에선 여러 인물이 돈을 벌고 호강하며 지냈다. 그 세력이 만든 위안부 이미지를 침범하는 일은 불경하고 되바라진 일이었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과 변영주 감독의 영화(낮은 목소리)이래 일본군 위안부들은 그들의 의도와 달리 누군가의 기획대로 우리 안의 성녀, 나눔의 집은 성소, 수요 집회는 성지 순례가 되어버렸다. 당자들이 바라지도 않는 바를 주변 세력이 자의적으로 설정하는 일은 온당한가, 정치적으로 올바른가.
최근 배은희 할머니의 기록을 들여다봤고, 길원옥 할머니의 음성을 들어보았다. 그간 일본의 배상을 받고 싶은 분들도 여럿 있었고 성노예라는 표현에 질색하는 분들도 다수 있었다고 들었다.
지난 세월 이어왔던 저 운동은 과연 누구를 위한 활동이었을까. 좀 심하게 이야기하면 자신들의 활동과 단체의 정치·영리적 목적으로 할머니들을 끌고 회술레를 돈 세월 아니었을까. 이 장은 필자에게 있던 정의연(과 활동)에 대한 일말의 의구심과 위의심을 깨게 해주었다.
문제는 아직도 이런 식의 담론과 의제설정이 번연히 이뤄진다는 점이다. 세계 저변 깊숙이 뿌리 내린 페미니즘의 이데올로그들이 여전히 왕성한 저술과 집필을 하는 중이다. 바라기는 저자들이 다음 기회엔 이 이데올로그들을 집대성해 사전식으로 편찬해내면 어떨까 한다. 더욱 많은 사람을 모아 한 사람이 몇 명씩 서술해내면 좋겠다.
하나 아쉬운 건 화급했던 주제의 책인 관계로 편집상의 흠결이 듬성듬성 보인다는 점이다. 문단마다 이격해 배치한 편집은 독서에 호흡을 멈추게 하기도 했다. 2쇄에서는 보정과 보완이 필요해 보인다.
한편 여성 앞에서 한 남성이 담배를 피웠다. 이는 남성성을 과시해 성희롱이라는 주장이 있었고 받아들여졌다. 여성 대상 몰래카메라엔 치를 떨고, 몸평엔 학을 떼면서 성별이 바뀌고 남성의 몰카사진은 조롱거리와 웃음거리가 됐다. 학내에 남자 구성원(직원, 외부 인력)은 필요 없다고 했다가 학교 행정과 학사가 마비되자 부랴부랴 원래대로 돌렸다는 여대가 있다.
개인 SNS상에 쓴 글을 두고 여성 혐오라 오독한 뒤 갖은 공세를 피워 생업을 잃게 만들었던 일이 있었다. 성희롱 가해자로 억울하게 누명을 쓴 가해자가 자살한 뒤 진상을 조사하자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라고 반발하는 측도 있다. 모든 일은 우리가 사는 이즈음의 세계에서 벌어졌다.
문제가 있지 않은가. 이를 옹호하고 주장하고 장려하기 위해 일관되고 성실하게 헛소리하는 집단을 알고 싶다면 우선 <페어괴>부터 보자. 돌이켜보면 페미니즘이라는 낱말을 마주하고 단 한 번도 납득하고 이를 지지한 적 없다. 그들이 가진 엄청난 상징 권력 앞에 그러는 척 눙치고 넘어갔던 세월이다.
여성인권 혹은 양성평등과 페미가 등식이라는 해묵은 오류에 빗금을 그어줄 시간이 왔다. 상대의 잘못엔 광분한 심판자가 되면서 자신들의 과오엔 끝 간데없는 변명으로 일관하고 이해를 바라는데, 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여성 혐오이고 공부가 부족한 상태라는 기괴한 주장을 더 이상 듣지 않을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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