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스 고딘은 “마케팅을 보면서 누군가 불편해한다는 건 흠이 아니다. 오히려 아무도 불편해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마케팅이 현상을 바꾸는 데 실패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나이키는 시대가 원하는 ‘공정’과 ‘정의’라는 키워드를 그들의 브랜드에 접목했다. 잠시 논란은 있었지만,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곧 밀레니얼들이 소비로 그들을 지지해줬으니까.
-<요즘 애들에게 팝니다>(김동욱 지음/ 청림출판 출판)
<요즘 애들에게 팝니다>라는 책을 읽었다. MZ세대의 소비 코드에 대한 책이었는데, 그중에 가치 소비라는 개념이 있었다. 권위주의 문화에 익숙한 기성세대는 윗사람들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비합리적 행태를 보이지만 수평적이고 공정한 사회 분위기에서 자라온 MZ세대는 그런 부당함을 더 이상 묵과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슬로건으로 MZ세대의 큰 지지를 얻었던 나이키와 일본 제품 불매 운동으로 큰 타격을 입었던 유니클로가 그 대표적인 사례로 소개됐다.
그런데 그들이 추구하는 걸 정말 정의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의문이 든다. 필자는 연애 예능 프로그램 <나는 솔로>에 출연한 경험이 있다. 필자가 출연했던 당시 이 프로그램은 대중적 인지도가 높지 않았으나 지금은 707베이비 영철을 필두로 한 수많은 빌런의 활약으로 전국구급 예능 프로그램이 됐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일반인 출연자들에 대한 악플의 수위가 선을 넘는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고려대학교 조치원 캠퍼스를 나온 출연자가 자기소개를 할 때 자기가 ‘조치원 캠퍼스’라는 걸 밝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학력 위조 논란이 생기는가 하면 제작진과의 사전 인터뷰 때 보여주었던 막춤을 남자 출연진들 앞에서는 추지 않았다고 진정성 논란이 불거진다. 무한 리필 고깃집에 간 것도 논란, 더치페이를 한 것도 논란, 다 논란이다.
최근에는 가수 다비치 출신의 강민경이 운영하는 ‘아비에무아’라는 회사의 채용공고가 논란이 된 일이 있었다. 경력직 채용공고를 올렸는데 연봉이 2500만 원으로 너무 적다는 것이었다. 이에 강민경은 2500만 원은 신입 연봉인데 담당자 실수로 경력직 공고에 잘못 올라갔다는 해명을 했고, 네티즌들은 그러면 신입은 2500만 원밖에 안 주겠다는 얘기냐며 반발했다.
이에 강민경 측은 신입 연봉을 3000만 원으로 인상하겠다고 했지만, 민심은 수습되지 않았다. 연봉은 2500만 원 주면서 자기 사무실 가구는 명품을 쓰냐는 둥, 논란이 되지 않았더라면 계속 2500만 원 줬을 거 아니냐는 둥 여전히 강민경의 SNS에는 악플이 달리는 중이다.
학력 위조가 어쩌고, 진정성이 어쩌고, 노동착취가 어쩌고. 말은 그럴싸하다. 제 나름대로는 모두 정의를 표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게 진짜 정의인가? 당신이라면 고려대학교 출신이라고 해놓고 뒤에 구차하게 ‘조치원 캠퍼스’라는 말을 굳이 붙일 건가? 안암동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으니 거짓말을 한 건 아니지 않나? 당신이라면 당신의 연인 혹은 배우자가 될지 모를 초면의 남자 6명 앞에서 막춤을 출 건가?
당신이 강민경처럼 회사를 운영하는 입장이라면, 2500만 원에 데려올 수 있는 수준의 역량을 가진 사람에게 회사 운영에 보탬이 될 수도 있고, 자기 주머니로 챙길 수도 있는 돈 500만 원을 기꺼이 더 얹어줄 건가? 2500만 원이 적다고 생각하면 그 회사에 안 들어가면 될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적합한 인재를 구하지 못한다면 회사 측에서 어쩔 수 없이 연봉을 인상하게 될 것 아닌가? 당신들도 지키지 않을, 애초에 지킬 의지도 없는 수준의 도덕적 잣대를 타인에게만 들이미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자기가 했던 말들에 대해 책임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연예인들은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대중에게 부당하게 욕을 먹더라도 이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 논리적, 이성적인 반박을 하더라도, 그들이 무죄였다는 게 밝혀지더라도 한 번 돌아선 대중의 마음을 돌리긴 힘들다. 그러니 머리를 숙이는 수밖에 없다. 죄송하다, 앞으로 조심하겠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다.
일반인 연애 예능 출연자들도 마찬가지다. 생전 받아본 적 없는 수위의 댓글과 DM에 아예 멘탈이 나가버려서 제대로 된 법적 대응을 하지 못한다. 실제로는 악플러들보다 훨씬 잘난 사람들이지만 악플러들에게 맞서 싸울 수는 없다. 그냥 맞아주는 수밖에 없다. 그게 재밌는 거다. 자기보다 유명하고 잘 나가는 사람들이 자기 앞에 머리를 숙였으니까 내가 저들을 이긴 거라는, 내가 저들보다 더 잘났다는 자기 효능감을 느끼는 것이다. 철창 속에 갇힌 로랜드 고릴라에게 돌맹이를 던지며 즐거워하는 심술 궂은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하지만 막상 그게 정의일 확률은 그다지 높지 않다. 필라테스를 한 달 정도 배운 적이 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여자들이 많이 하는 운동이라서 쉬운 줄 알고 도전했다. 홈트레이닝과 헬스를 도합 10년 가까이 꾸준히 해왔고, 주말에는 축구도 하고, 틈틈이 러닝도 하기 때문에 필라테스쯤은 쉽게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해보니 생각 외로 너무 어렵고 힘들었다. 유연성이야 평소에 특별히 스트레칭을 하진 않으니 부족할 수 있다는 예상을 했지만, 근력도 엉망이었다. 문제는 디테일이었다. 개수와 중량에만 신경을 쓸 땐 하나도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던 동작들이었는데 호흡과 움직임의 디테일을 신경 쓰려니 몇 배로 힘이 들었다. 힘에 부쳐서 잠깐 긴장을 놓으면 디테일은 무너졌고, 그 동작은 효과가 없는 무의미한 동작이 됐다. 그래서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체력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소진됐다. 평소에는 50번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동작이었는데 제대로 하려니 10번 하기도 힘들었다.
그때 알게 됐다. 우리의 본능은 놀라울 정도로 편안함을 추구하는구나.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본래의 관성으로 돌아와 버리는구나. 무언가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한순간도 긴장을 놓아서는 안 되는구나.
정의라는 것도 그렇다. 정의를 지키는 건 그렇게 당당하고 멋진 일이 아니다. 오히려 정의는 우리를 마음 졸이게 만들고, 포기하고 도망치고 싶게 만든다. 광주 민주화 항쟁에 나선 시민들이 영화 <택시 운전사>에 나오는 것처럼 전두환의 공수부대 앞에 당당히 나설 수 있었을까?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죄목으로 사형대에 오르기 전 안중근 의사는 어땠을까?
총에 맞으면 얼마나 아플까, 어쩌면 아픔을 느끼기도 전에 죽어버리려나, 한 번에 안 죽으면 어떡하지, 내가 죽으면 우리 어머니와 자식들은 어떻게 하나, 지금이라도 판사한테 잘못했다고 빌면 혹시 죽음만은 면하게 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수십 수백 번을 고민해가면서 겨우 한 번 행할 수 있는 것이 정의다. 그렇기 때문에 정의를 지키려면 한순간도 긴장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지금 내가 행하고 있는 게 정말 정의인지, 내 마음 편하려고 그럴싸한 미사여구를 갖다 붙인 건 아닌지 끊임없이 자문해야 한다. 필라테스할 때처럼.
그러니까 당신이 지금 추구하고 있는 것, 당신을 편안하게 하고, 도취하게 하고, 스스로 멋진 사람이 된 것처럼 느끼게 하는 건 막상 정의가 아닐 확률이 높다. 그보다는 정의로운 행동을 하고 있다는 달콤한 착각에 가깝다. 만약 당신이 연예인 SNS에 달았던 댓글을 당신 회사 사장님한테 똑같이 읊을 수 있다면 당신을 정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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