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에 글 하나, 인터넷언론 <민중의 소리>에 보냈는데 퇴짜를 맞았다(가끔 기고문을 보내면서도 별로 신명 나지 않았다. 그 사이트에서 철학자 이병창 말고는 무게 있는 필자를 발견하지 못했다. 점점 맥이 빠져서 손을 뗐다가 오랜만에 다시 기고한 글이 퇴짜를 맞았다).
여러 가지 생각거리를 던져준 해프닝이라서 여기 끄적거려 본다. 필자의 글은 (3월 말부터 5월 중순까지 방영된)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작가를 변명하는 얘기였다.
그런데 이메일의 ‘(글) 보내기’를 누를 때 글이 퇴짜 맞을지 모른다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그 언론은 ‘페미(니즘)’를 공식 깃발로 내건 곳도 아니었고, 필자의 글이 누구 또는 어느 동네(패거리)를 겨누어 사납게 비판한 글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러 알겠지만 <나의 아저씨>는 방영되기도 전부터 트페미(트위터 페미니스트)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늙은 아저씨(이선균)와 어린 여자(아이유)가 연애한다니 아이, 더러워. 기분 나빠!
첫회가 방영되자 몇몇 먹물쟁이(남녀관계 전문가) 여자들이 거들었다. “그거 늙다리 남자 속물들(한남충) 얘기잖아? 결국 어린 여자는 늙은 남자를 사랑하게 되고, 남자를 빛내주는 들러리가 될 거야!” 하는 글들이 올라왔다.
심지어 궁예 뺨치는 관심법(!)을 부려 쓴 먹물쟁이도 있었다.
남자를 거룩하게 빛내려면 가장 불쌍한 여자를 짝지어 줘야 해. 그래서 벙어리 할머니를 모시고 빚쟁이한테 시달리며 살아가는 천하의 외톨이를 작가가 (일부러) 여주인공으로 삼은 거야. 작가의 그 컴컴한 속내를 어찌 아냐구? 내 눈에는 다 보여!
페미들한테 싫은 소릴랑 꺼내지 마라?
필자의 글은 이랬다. 연애 드라마가 될까 봐 싫어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몇 차례 방영된 내용을 보니까 이 드라마는 연민과 공감의 드라마이지, 연애 드라마가 아니다. 설령 마지막에 가서 연애 얘기가 가미된다 해도, 그래서 드라마가 주는 감동이 쪼끔 빛이 바랜다뿐이지, 그 예술적 가치가 모조리 부정될 일은 아닐 것이다.
두 남녀는 사회적 처지가 너무 달랐고, 남자는 자식한테 상처를 줄까 봐 바람 핀 아내와 결별하는 것도 꺼린 고지식한(?) 사내였다. 둘이 연애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짠다면 드라마가 주는 리얼리티가 손상된다. <나의 아저씨>는 끝끝내 연민과 공감의 드라마를 견지했다.
<민중의 소리> 편집자한테 글이 왜 문제가 되냐고, 거기 누구를 심하게 비판한 얘기라도 있냐고 따졌다. ‘미투 운동에 반대하냐’고 필자에게 되묻더니(미투운동의 후유증이 컸다. 한 선생은 억울해서 자살했고, 한 시인은 자살 직전까지 갔다. <리얼뉴스>에 실린 배우 조덕제·소설가 하일지의 인터뷰를 참고하라), 사이트 운영에 참여하는 여자들하고 상의해 보겠다 그러고는 끝내 퇴짜를 놨다. 다시는 필자에게 원고 청탁하지 말라 이르고 전화를 끊었다.
열이 올라서 인터넷으로 페미 동네 얘기를 뒤져 봤더니 파국론을 탐구하는 사회학자 문강형준의 얘기가 올라 있다. “요즘 페미 흐름 중에 문제가 좀 있다”는 글을 어디 기고했다가 퇴짜 맞고 기고자 명단에서 잘렸단다. 그가 딴 사람이 건넨 충고도 들려줬는데 페미들이 꽉 장악한 진보 동네에서 감히 페미들한테 싫은 소리 꺼내지 말라는 조언이다.
코미디언 유병재 얘기도 읽었다. <나의 아저씨> 드라마가 참 좋은 작품이라고, 기다려진다고 SNS에 끄적거렸다가 트페미들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나 화를 내자 금세 꼬리를 내렸다. “여러분의 어려운 현실을 잠깐 잊었노라”고, 사과문을 올렸다.
그는 친여성적인 발언을 꾸준히 해와서 트페미들한테 환심을 샀더랬는데 팬을 잃지 않으려고 그 앞에 납죽 엎드린 것이다. 세상에 사과할 일이 따로 있지, ‘문학적인 감식안’에 대해 도덕적인 죄의식을 품어야 한다는 말인가.트페미들의 대꾸가 걸작이다.
용서해 드리지요. 당신 잘못은 우리를 불쾌하게 만든 거예요.
그래, 여성들한테는 진리 파악의 특권이 있으니 여성들 심기를 건드리지 마라?트페미들을 보면 학교의 문학 교육이 깡그리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옛날 박정희 시대의 경찰 당국이 송창식의 노래를 끝까지 듣지도 않고 ‘왜 불러?’라는 말 한마디에 불쾌하다고 반응했듯이, 21세기의 일부 민초들은 <나의 아저씨>라는 제목만 듣고도 저주의 굿판을 벌였다.
이들은 작품을 전체로서 안 본다. 순간순간의 장면에 따라 반응한다. 학교에서 ‘작품을 제대로 읽어내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교육 효과도 없는데 중·고교 국어 교과는 (아이들 학습 부담도 덜어줄 겸) 아예 폐지하는 게 낫지 않을까.
페미들은 <나의 아저씨>가 연애 드라마로 발전할 것 같지 않으니까 그 얘기가 쑥 들어간 대신에 폭력 장면이 혐오감을 준다고 새 트집거리를 찾았다. 며느리가 미우면 발뒤꿈치까지 밉다는 얘기렷다. 이지안(이지은)이 이광일(장기용)한테 얻어맞다가 “너, 나 좋아하지?” 하고 캐묻는 장면이 나오자 “옳닷구나. 이거 데이트폭력이다” 하고 서슬 퍼렇게 목청을 높였다.
어떤 장면이든 앞뒤 맥락 속에서 그 적실성 여부를 따질 일이다. “폭력장면은 무조건 안 돼!” 하고 다그친다면 이들의 예술관이 검열의 망나니 칼을 휘두른 박정희 군사정권의 그것과 무엇이 다른가? 중·고등학교 6년간 문학 공부를 했으면 이야기의 앞뒤 맥락을 따지는 눈을 틔웠어야 하는 거 아닌가? ‘데이트 폭력’도 터무니없는 억측임이 나중에 밝혀진다.
트페미들이야 그 무익한 ‘점수따기 공부’밖에 안 한 평범한 대중이니 그렇다 치자. 언론에 글 한 줄 발표하는 여성평론가들까지 가세하고 나섰다. 구타당하는 여자의 현실(!)이 여기 있는데 그것을 어찌 표현하지 말라는 얘기냐는 반박에 대해 어느 여성평론가는 ‘에둘러 나타내면 될 거 아니냐’고 넉살 좋게 늘어놨다.
그 얘기를 수용해야 한다면 끔찍한 폭력과 갈등을 담은 갖가지 드라마들은 다 철퇴를 맞아야 한다. 드라마(영화) 검열이 엄격한 이슬람권을 본받아야 할까. 그렇다면 TV는 동화같이 착한 장면들만 보여줘야 한다. ‘진보’를 한사코 내세우는 여성들이 어느새 보수파의 세계관과 한통속이 돼 버렸다.
“세상 사람들을 어린이로, child로 간주하라!” 그런데 두 겹의 잣대다. 자기들 마음에 안 드는 장면이 나올 때만 검열의 철퇴를 휘두른다. 그렇게 나대는 사람들 자신이 child 아닐까.
인터넷을 뒤지다 보니, 트페미들이 대중문화를 <자본경제의 관념>으로 바라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어떤 연구자는 아이돌 팬덤활동을 열렬히 하는 청년과 인터뷰했는데 ‘윤리적 소비 어쩌고’를 말해서 찔끔 놀랐단다.
우리는 베토벤의 웅장한 ‘합창 교향곡’과 처절한 민족사를 일깨워준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소비하는가? 파시스트들의 잔혹함을 고발한 피카소의 그림 ‘게르니카’를 윤리적으로 소비하는가?
요즘 ‘방탄소년단’을 가리켜 무슨 예술혁명을 이뤄냈다고 철학박사까지 나서서 찬송가를 부르고 있는데(그런 글이 있길래 방탄소년단의 노랫말을 몇 개 검색해 봤다. 내 감수성이 아둔해서인지 별다른 감흥이 오지 않았다.
‘방탄 혁명’에 도취된 사람들은 그 혁명을 입증하는 더 철저한 탐구작업을 해줘야 한다. 방탄을 들뢰즈와 견준다? 빅뱅과 엑소라고 못 견줄까. 그들 인기가 놀랍다고 호들갑 떨지 마라), 그렇다면 그 팬들은 ‘혁명적 음악예술을 소비’했는가? 예술과 소비는 참 어울리지 않는 개념짝 아닌가?
<나의 아저씨>를 욕해댄 페미들은 “소비자의 힘을 보여주자!”고 은연중에 결의들을 모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 작품의 시청률을 떨어뜨리고, 그 작가를 드라마계에서 쫓아낸다면 그들은 환호성을 지를 것이다. “만세! 소비자가 단결하여 페미니즘의 진전을 이뤄냈다!”고.
소비자는 “저거, 사? 말아?” 하는 2분법으로 세상을 마주한다. 내 취향과 안 맞으면 안 산다. 드라마에 여자를 실컷 두들겨 패는 장면이 나오면 곧장 그 혐오감에 반응한다.
이와 달리, 문화의 향유자는 그 생산자를 ‘갑질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문화를 만들어가는 동료로 여긴다. “폭력장면이 싫군. 하지만 내 동료가 왜 저 장면을 보여줬는지 이야기 맥락을 좀 더 살펴보고 판단해야겠군.” 그 맥락을 살핀 뒤, 생산자의 의도를 수긍하거나 건설적인 비판을 건넨다. “그 장면은 앞뒤를 살펴봐도 뜬금없었네. 앞으로 유념하기 바라네.”
지엄하신 고용주께서 비정규 파견직한테 문자메시지로 ‘해고’ 통보를 날리듯이, ‘너는 TV 동네에서 당장 꺼지라’고 즉흥적으로 퇴출 선고를 내리지 않는다. 진짜 페미니즘이라면 향유자와 소비자, 어느 관점에 따라 문화생활을 해나가야 할까.
여성운동의 초라한 현주소
자본체제가 퍼뜨린 못된 대중심리 현상의 하나가 연예인들을 하대하는 것이다.
너는 우리 덕에 돈 벌지? 그러니까 우리가 ‘갑’이고 너는 ‘을’이야. 우리는 너희를 밟아주는 맛으로 산다!
욕먹어도 싼 연예인들도 많겠지만, 욕도 품위 있게 해야 한다. 무학대사의 말씀을 떠올리자. “그들을 돼지로 여기지 마라. 그들을 사람으로 대접해야 그들도 우리를 (돈벌이 대상이 아닌) 사람으로 대접할 것이다”
배우 유아인이 페미들과 댓글 말다툼을 벌인 적 있다. 한쪽은 ‘인기 하락’을 무릅쓰고 벌이는 비대칭의 싸움에서 진짜 사람다운 모습을 보인 쪽은 누구일까(유아인과 댓글 다툼을 벌이다가 대한의사협회로부터 징계를 먹은 정신과 의사도 있었다). 유치한 댓글 놀이가 나이 어린 트페미들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연예인 아이유의 사례를 음미해볼 가치가 있다. <나의 아저씨> 소동은 애초부터 아이유의 ‘어린 이미지’를 떠올려 시작된 것이다. 비난의 화살도 작가가 아니라 아이유한테 쏠렸다.
우리가 이선균 플러스 아이유, 주인공 조합이 싫다고 했으면 당장 드라마 출연을 관둬야지 뭘 믿고 뻗댄 거냐?
트페미들이야 원래 기분대로 떠들며 살아왔으니 그걸 크게 나무랄 일은 못 된다. 어이없는 것은 평론가 명함을 내밀며 언론에 글을 써대는 페미니스트들이다. 아이유는 그 출연과 관련해 비판받아야 한다는 자칭 전문가들의 논평이 버젓이 활자에 실려 있다.
처음에는 ‘연애 드라마’라는 이유로, 다음에는 ‘여성혐오적(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이 나온 드라마’라는 이유로! 드라마의 허술함에 대해 배우가 책임을 져야 한다니, 우리 사회에서 아이유가 여태껏 엄청난 문화적 영향력을 발휘해 왔는가 보다.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기만 해도 ‘좀 괜찮은(영리한) 연예인의 하나’일 뿐임을 알 텐데 말이다(아이유를 두고는 ‘노랫말이 좋고(문학성이 더러 보이고), 노래를 맛깔나게 부른다’는 칭찬 정도였지 무슨 예술혁명을 이뤄냈다는, 감격에 겨운 찬송가는 나온 적 없다. 페미들은 “사람들아, 왜 ‘남자 아이돌’만 그렇게 하늘처럼 떠받드냐?” 하고 세상 풍조를 비판해야 하지 않을까).
이 허무맹랑함은 사실 여성운동의 초라한 현주소를 말해 준다. 고작해야 대중문화를 놓고 이러쿵저러쿵 말발을 세우는 것이 우리 사회에 정말 소중한 전진을 낳는다고 자랑하고 싶은 그들의 안쓰러운 희망을!
이를테면 ‘몰카 대책 세우라’는 집회가 열릴 때, ‘낙태 허락하라 집회’도 함께 열렸다. 전자는 과녁도 불분명하고 당장 뾰족한 대책이 나오기도 어려운 사안인 반면(총기가 시장에 안 나돌 듯 몰카가 시장에 안 나돌아야 근본적으로 해소된다), 후자는 당장 치열한 사회적 토론을 벌여 진전을 이뤄낼 수 있고, 또 그걸 이뤄내야만 일부 여성들의 고통을 당장 덜어줄 수 있다.
산부인과 의사들이 “불법을 무릅쓴 시술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지 않았던가. 낙태 문제는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관련된 핵심 사안이다. 그런데 여성들은 저희한테 발등의 불같은 문제는 별로 거들어 나서지 않고, (소리쳐 봤자 뚜렷한 변화가 생길리 없는 곤혹스러운 문제에 대해) 그저 자기들 분격한 마음을 터뜨리려고 감정에 겨워 대학로 집회장으로 달려갔다(경찰을 나무란다고 풀릴 일이 아니다. 딴 일은 제쳐놓고 경찰이 그 수사만 몰두해야 할까. ‘몰카 편파수사 규탄’ 집회는 그 명분 자체가 미심쩍어서 더 문제가 됐다. 정말 편파수사였을까). 이와 달리, ‘낙태 문제의 사회적 토론 주체’는 더 넓어지지 않았다.
이런 현실과 견줘 볼 때, 대중문화를 둘러싼 입씨름은 얼마나 한가로운가. 대중문화 자체라도 좀 개선해낼 입씨름이었던가? 아서라, 그런 좀스러운 입씨름은 세상을 털끝만큼도 바꿔내지 못한다. 아니, 바람직하지 않은 쪽으로 문화를 퇴행시킬 위험마저 있다.
그래서 눈치 빠른 페미들은 ‘백래시(여성운동에 반발하는 사회 조류)’를 걱정한다. 정말로 걱정할 요량이라면 사그라들던 일베의 기세를 메갈리아·워마드가 오히려 살려줬다는 당혹스러운 사실부터 똑바로 자기 성찰하라(‘급진페미’와 격투를 벌이는 <리얼뉴스>에 들어가 보니까 메갈리아 성향의 페미들이 정의당에서 유시민 등을 내몰고 권력을 차지하려다가 분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소개해 놨다. 정의당이 과연 자유한국당이 비워 놓은 공간을 차지할 실력이 되는지 미심쩍게 만드는 대목이다. ‘워마드’에 박사모가 침투한 것 아니냐는 소문도 나돌았다. 그런데 페미 동네는 메갈리아, 워마드를 집요하게 싸고돌았다).
‘정치적 올바름’의 끔찍함에 대해
옛날얘기도 좀 들추자. <나의 아저씨> 입씨름이 진보파 쪽에서 벌인 굿이라면 아이유의 노래 ‘제제’를 둘러싼 난리굿은 몇 해 전에 보수파 쪽에서 벌였다. “내 어린잎을 가져가. 잎사귀에 입을 맞춰” 하는 노랫말이 ‘소아 성애’를 부추긴다는 유죄 선언이었다.
흥미로운 입씨름이라 그 당시 인터넷을 자세히 뒤져봤더랬는데 심판하는 쪽은 서슬이 퍼랬고, 두둔하는 쪽의 목소리는 쭈뼛거렸다. 언론은 대중의 문화수준을 높이는 향도자 노릇을 해야 할 터인데, 그저 사실만 알렸지, 막무가내의 마녀사냥에 대해 대차게 비평(비판)한 기사나 칼럼이 별로 없었다.
기본부터 살피자. 현실에서 ‘소아 성애’를 저지른다면 벌을 내려야 한다. 하지만 가상 세계에서 (어린아이와의) 에로틱한 장면을 그려낸다고 벌을 내려야 할까. 영화 속에서 누가 어린애를 성폭행하는 것을 즐기는 장면이 나온다면 벌은 아니라도 비판할 일이긴 하겠다.
하지만 행여나 속단하지 마라. 영화 <레옹>에는 남자가 어린 여자애와 같은 집에 사는 장면이 나온다. ‘소아 성애’가 벌어지지 않았을까, 짐작은 해볼 수 있으나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분명하지 않은 사실을 놓고서 마녀사냥을 벌이면 안 된다. 넘겨짚어 단죄하고픈 마음이 굴뚝 같다면 아예 (타락한 장면들이 차고도 넘치는) 영화 장르를 폐지하자고 외치는 게 맞다. 이란의 최고 성직자가 무척 기뻐할 게다.
노래 ‘제제’도 에로틱한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가 짐작해볼 수는 있다. 하지만 그저 느낌뿐이지 성애 장면은 없다. ‘짐작’만으로 창작자를 때려잡는 것은 우리 모두 ‘궁예’가 되자는 얘기다. 그렇게 궁예들이 설친다면, 그래서 재수 없이 걸리는 사람이 치도곤당한다면 노래 창작자들이 어디 겁나서 노래를 만들겠는가.
현실에서는 ‘소아 성애는 끔찍한 반인륜’이라는 서슬 퍼런 단죄에 질려서 누구 하나 마녀사냥에 대차게 토를 달고 나서지를 못했다. 쭈뼛거리며 토를 단 비평가는 몇 있었지만(마녀사냥을 꼬집은 신문기사가 하나도 없었다. 문화면 신문기자들은 한결같이 ‘기레기’다).
심리학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소아성애의 상상놀음을 접한다고 사람이 현실에서 소아 성애 범죄의 유혹을 더 느끼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특별히 소아 성애의 기질을 품은 사람이 소아 성애를 저지르는 것도 아니라는 조사 결과도 있다. 실제 행동과 상상 놀음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둘 사이에 에로틱한 분위기를 그려냈다는 사실만 갖고서 예술작품을 늠름하게 단죄하는 것은 정말 망나니 같은 짓이다.
노래 ‘제제’를 더 읽어 보랴? 무릇 사람들은 어떤 대상에 자기를 감정 이입하여 노래한다. 라임오렌지나무가 제제한테 건네는 말은 실은 창작자(아이유)가 자기의 또 다른 분신(나)에 대해 건네는 말로 읽는 것이 마땅하다. 자기와 아무 관련이 없는 대상을 그려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나’더러 가까이 오라는 말이 어찌 소아를 탐내는 말인가? 그 노랫말에 대해 창작자의 자기애가 너무 넘친다고 흉볼 수는 있을지언정 무슨 반인륜 범죄를 부르꾀는 얘기로 탄핵한다는 말인가(노랫말을 옮긴다. “너는 짓궂어···조그만 손가락으로 소리를 만지네. 간지러운 그 목소리로 색과 풍경을 노래 부르네. 나무에 올라와···” 이 장면에서 섹스를 떠올리는 사람이 오히려 미친놈 아닐까).
그런데 그렇게 용맹했던 여성들이 마녀사냥 앞에서 잠잠했다. 남성 창작자가 ‘에로틱한 공상’을 했더라면 사냥꾼들이 그렇게 설쳐댔을까. 그 사냥꾼들 앞에서 여성 창작자를 변호할 수는 없었을까. 미운털 박힌 사람이라 ‘나 몰라라’ 했을까.
우리는 퇴행(야만)의 시대를 살고 있다. 유럽에서 ‘이민자들, 꺼져라!’ 하는 여론의 돌풍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는 광경을 여러 해 전부터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그럴 사정은 충분히 납득이 가지만 어찌 됐든 ‘민주’를 자랑해온 서방 사회에서 ‘관용’의 가치가 송두리째 사그라지는 현실을 부인할 수 없다. 좌파가 몰락하고 우파가 득세하는 세상이다. 이럴 때 우리는 ‘남 탓’만 할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돌아봐야 한다.
우리가 성찰해야 할 주제의 하나가 ‘정치적·규범적 올바름’의 악폐다. 보수파에게 그 푸닥거리가 어떤 폭력으로 나타나는지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 통합진보당을 때려잡으면서 그들이 내걸었던 명분을 살펴보아라. “반란을 꾀하는 정당은 때려잡는 것이 우리 국시에 맞느니라!” 그런데 진보파가 ‘올바른 원칙’이라며 들먹인 것들 가운데 자기 성찰이 필요한 대목은 과연 없었을까.
최근의 미국 대선을 떠올려 보라. 미국의 여성운동가들은 ‘트럼프처럼 여성을 우습게 여긴 사람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전선을 쳤다. 맞다. 옳은 말이다. 그런데 힐러리라고 대통령감일까. ‘(양성평등의) 정치적 올바름’ 면에서는 그럴지 모르나 민중의 살림살이를 옹호하는 면에서는 자격 미달이었다. 미국의 노동 대중은 힐러리를 ‘월가의 앞잡이’, ‘썩을 대로 썩은 기성정치의 대명사’로 여겼는데, 여성운동가들만 팔이 안으로 굽었다(여성대통령이라면 박근혜도 옳다는 사람들 많다).
‘정치적 올바름’은 고려할 여러 요소의 하나일 뿐이지, 그것 하나만 신줏단지로 받든다면 위선이 되고 망조가 든다. 대선 결과를 보면 여성운동이 힐러리 진영에 가담한 것이 대중에게 아무런 감명도 주지 못했다.
미국의 여성운동이 진정성이 있었다면 샌더스와는 연합할지언정 힐러리와는 연합하지 말았어야 한다. 그 지지를 보류하고 민주당 개혁을 벌이든지 민주당을 뛰쳐나와 딴 정당을 만들든지. 그들은 ‘은수저(중산층) 여성운동’에 머물렀는데 그래서는 제자리걸음 또는 뒷걸음질뿐이다.
트럼프 당선 뒤 ‘이민 가겠다’고 울부짖은 사람이 많았다는데 지금 북미협상은 공화당도 민주당도 뜨악하게 쳐다보고 트럼프 한 사람의 결단만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나마 트럼프가 낫다’고 말할 일이 아닌가? 오히려 민주당에서 표심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제제’와 <나의 아저씨>를 둘러싼 소동도 섣부르게 ‘규범적·정치적 올바름’을 따져 묻는 짓거리들이 대중문화를 어떻게 황폐하게 만드는지 생생하게 보여 준다. ‘소아 성애는 반인륜’이라거나 ‘여자를 들러리 세우는 이야기는 그만두어라’는 앙상한 머릿속 잣대 하나를 대단한 금과옥조로 내세워 복잡다단한 현실을 저희 꼴리는 쪽으로 손쉽게 재단해서 사람들을 주눅 들게 만들었다.
우리는 지금 정치적으로도 뒷걸음질을 치고 있다. 어제는 그나마 봐줄 만했던 사람이 오늘은 개차반으로 아예 쭈그러들었다. 이명박 정권 초기만 해도 자유한국당 패거리들이 지금만큼 꽉 막히지 않았다.
“내 정치생명을 잃고 싶지 않으니 난 무슨 짓이든 벌일 거야!” 하고 막가파로 놀고 있는 지금보다는.
진보파는 어떤가. 같은 시대의 물살을 타고 있는데 이들이라고 좀스럽게 오그라들지 않았겠는가. 민주노동당이 산산조각이 나서 지금의 진보진영으로 쪼그라든 일련의 과정을 되살펴 보라. 집단(단체)만 쪼그라든 게 아니고 개인(사람)도 쪼그라들었다.이를테면 제주도에 예멘 난민을 받는 문제가 생겼을 때 어느 페미니즘 전문가가 이렇게 글을 올렸다.
예멘 남성은 한국 여성들보다 사회적 강자다. 그러니까 난민을 받으려면 실질적 대책을 세워라.
그럴싸한 말 같은가? 솔직한 말로 옮겨놓자. “예멘 남자들이 한국 여자를 성폭행할 수 있어. 그러니까 난민을 받지마” 이 여성 전문가는 워마드를 두둔하며 지내다 보니까 생각의 수준이 워마드와 같아졌다.
한국 남자들은 성폭행 안 하는가? 한국 남자들도 쫓아낼 셈인가? 대중의 공포 심리를 다독일 생각은 않고, 거기 영합하는 게 ‘페미니즘의 살길’이라고 여기는가? ‘난민을 퇴짜 놓는 여성운동’을 어떻게 이뻐해 주라는 말인가?
진보 동네(또는 시민사회)를 둘러 보면 절박한 노동현실의 변혁에 나서거나 민족 자주의 입장에서 북미협상의 교착상태를 타개할 강단들은 부족해 보인다. “문재인 정권이 좀 더 잘해 줬으면” 하고 먼산바라기 되어 기대할 뿐이다.
진보 동네의 독자성(차별성)은 고작해야 ‘여성문제’나 ‘성 소수자 문제’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러니까 남녀 간에 티격태격하는 문제도 큰 눈으로 살피지 않고 그저 ‘여자들 편드는 게 장땡’이라는 대결 논리에 휩싸인다. 마구 떠들다 보면 자기들도 뭔가 운동을 하는 것 같은 흐뭇한 기분을 느낀다. 아니, 그런 기분을 느끼고 싶다.
이런 것이 진보운동이라면 진보운동, 거 참 쉽다!
하지만 힐러리 지지운동이 보여줬듯이, 그래서는 민중의 다수를 움켜쥐지 못한다. 문재인 정권은 부동산 폭등 대책에서 은수저로서 계급본색을 드러냄에 따라 원래(대선 때) 그들의 지지율로 내려앉았고(그들은 종부세를 강화해 부동산 양극화를 개선할 의지가 없다.
‘현상유지’를, ‘더 악화되지 않기’만을 바란다. 남북정상회담 성사로 다시 지지율이 반등했으나 경제문제가 불거지면 언제든 하락한다), 그들을 대신할 본때 있는 정치세력이 나서 주기를 민중은 고대하고 있는데, 이렇게 정치적 공간은 열려 있는데 진보동네는 그 여망에 부응할 실력이 못 된다.
여성운동이건, 정당운동이건 자기 실천의 허술한 구석을 짚어내고 이를 혁신하자고 동료들을 꾸짖을만한 권위 있는 어른이, 지도자가 없다. 자기혁신 없이 진보변혁운동이 민중에게 신뢰를 얻을 세력으로 우뚝 설 수 없는데도! 가령 1950~1970년대 프랑스에는 사르트르라는 구심점이, 사상적 지도자가 있었는데 지금 우리한테는 없다. 10~20년 뒤에는 대학이 지적 폐허로 영락해갈 염려도 높다.
보태는 말: 책 한 권 추천한다. 폴 메이슨(영국의 언론인)이 쓴 <포스트자본주의, 새로운 시작>(더퀘스트 펴냄)이다. 그는 마르크스와 걔네 동네를 따끔하게 비판한다. 19세기 영국 노동자계급이 어디로 지향해 갈지, 잘못 읽었다는 데서부터 이것저것. 특히 소련의 현실사회주의를 놓고는 꼬집을 대목이 참 많다. 하지만 ‘노동가치설’은 비판하지 않는다. 체제의 전환을 내다 볼 수 있게 돕는다고 강력하게 변호한다. 그런 통찰력이 있는 만큼 마르크스의 (고분고분하지 않은) 제자라 하겠다.
저자는 정보자본주의에 주목한다. ‘공짜 기계’를 가져다줄 기술혁신이 ‘자본주의 이후’의 체제 전환을 가능케 할 토대가 된다고 본다. 그 미래가 어떤 모습을 띨지 자세히 점칠 수 없어서 ‘사회주의’라는 긍정 명제는 선뜻 내걸지 못하지만 ‘자본주의의 몰락’ 경향은 너무 뚜렷하므로 ‘포스트자본주의’라는 부정 명제를 내세웠다.
현실의 대중문화만 놓고 보면 디지털문명이 우리의 커뮤니케이션에 너무 큰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는 불편한 감정만 자꾸 생겨난다. “살갗 부딪치는 대인 접촉은 않고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리는 꼴이라니!” 하지만 디지털문명이 우리의 물질적 토대를 바꿔놓고 있으므로 거기서 미래의 동력을 끌어낼 수도 있다.
저자는 지금의 문명적 교착상태를 풀어낼 ‘현실적 대안’을 찾아보자고 치열하게 권고한다. 우리를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신자유주의가 어찌 망했는지, 또 50년 단위의 장기 순환이 왜 멈췄는지를 다 훑어볼 여력이 안 된다면 ‘공짜 기계’가 어째서 자본주의 아닌 체제를 가능하게 하는지, ‘탄소 제로 기획’이 왜 도전해 볼 만한 대안인지 탐색하는 대목만이라도 읽어 보길 바란다. 우리에게 지금 요긴한 것은 ‘실천적인 희망’을 움켜쥐는 일이라서다.
구체적으로 우리의 앞날을 내다보자. 2008 세계대공황 같은 것이 다시 닥친다면 우리는 그때 그랬듯이 또 돈을 마구 찍어내서(이를 음험하게 포장한 낱말이 ‘양적 완화’다) 경제 붕괴 사태를 봉합할 수 있을까. 세계 GDP가 40조 달러인데 그때 여러 나라가 12조 달러를 찍었다. 그런데 한번 써먹은 극약처방은 다시 듣지 않는다. 부르주아들이 짜낼 묘수는 이미 다 나왔고 지금으로서는 뾰족한 수를 떠올릴 수 없다. 어찌해야 쓰겠는가?
기상학자 중에는 (지구온난화의 결과로) 여태껏 보다 훨씬 강력한 태풍이 생겨날 거로 예측하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부산’ 같은 도시가 송두리째 박살이 났다고 치자. 이는 국민국가가 감당할 재난의 수준을 훌쩍 넘어선다. 아마 중앙정부는 이재민들을 동정하는 것 말고 더 보탤 일이 없겠다. ‘내 안위는 내가 돌볼 수밖에 없다’는 끔찍한 패닉 현상이 전국에 퍼져 나갈 터인데 그런 사태는 또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까.
18세기 초, 포르투갈의 리스본에 대지진이 터졌다. 리스본 대부분이 파괴돼서 유럽인들 모두가 큰 충격에 빠졌다. 신앙심이 흔들린 사람도 참 많았다. 앞으로 ‘재난자본주의’ ‘재난사회주의’ 시대가 찾아올 것이다. 그 지진사태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그래서 ‘실천적인 희망’을 붙드는 것이 정말 긴요하다. 뭔가 절박한 상황과 맞닥뜨렸을 때 ‘정치적 실천의 길라잡이’가 돼줄 기획(관념)을 붙드는 것이!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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