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동성애 반대’ 발언과 급진적 인권운동의 착각

리얼뉴스 승인 2017.04.27 17:25 의견 0
지난 25일 <JTBC> 대선 토론회에서 나온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의 ‘동성애 반대’ 발언이 SNS와 언론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다.

문재인의 ‘동성애 반대’ 발언은 기독교 단체와의 면담에서 나온 ‘동성애를 (문화적으로)지지하지 않는다’는 발언의 연장선에 있다. 동선결혼에 대해서도 시기상조라는 입장이다.

‘동성애에 찬성하냐 반대하냐’라는 홍준표의 질문에?문재인은 ‘동성애 반대’하지만?‘차별에는 반대’한다고 말했다(사진=jtbc)

동시에 ‘성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차별에는 반대’하며 ‘차별금지법에 대해서도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그동안 밝혀왔다. 문재인의 최근 발언은 사실 과거의 중도적 입장과 다르지 않다.

애초 지적해야 할 곳은 ‘동성애에 찬성하냐 반대하냐’라는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의 질문 자체가 부적절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급진파 성 소수자 운동 단체들이 표적으로 정한 곳은 동성애와 에이즈를 연관시킨 홍준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문재인의 발언이었다.

그들이 그러는 이유는 중도정당에서 자신들의 선명성을 부각하고 언제든 도덕적 낙인을 찍을 준비가 되어 있는 세력으로 남아야 지분을 차지하고 조직으로서 살아남기 때문이다. 사실 이건 성 소수자의 문제가 아니라 급진적 인권운동 전체의 문제이다.

더불어민주당이 그런 선명성 과시의 소재로 언제까지나 끌려다닐 필요가 없다. 우리나라는 미국 민주당 리버럴 모델로 가면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더민주당도 급진적 인권운동권과 관계 재설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더민주당 일각은 그동안 급진적 인권운동에 너무 아부해온 경향이 있다.

정의당이 더민주당의 나와바리가 아니듯이 더민주당 역시 급진적 인권운동의 나와바리가 아니다. 당사자 운동의 문법과 정당정치의 문법은 기본적으로 다르다. 그것을 뒤섞고 싶다면 더민주당에서 무언가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 정의당이나 노동당·녹색당에서 자신들의 정치를 관철하는 것이 더 빠르다.

급진적 인권운동은 이들과 함께 하세요(사진=녹색당)

한편 미국 민주당이 매번 선거에서 죽을 쑤는 이유 중 하나는 개별 당사자·소수자 입장에서의 ‘정치적 올바름’을 진보정치의 핵심 가치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계가 있다. 우선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포괄하기에는 각자의 소수자·정체성 마다 서로 이해관계와 지향이 다르다.

당장 ‘게이 똥꼬충’ 등 성 소수자 비하 논란을 일으킨 메갈리아 논쟁을 보라. 이런 경우에는 여성주의냐, 성 소수자 권리냐의 문제가 충돌한다. 급진적이고 과격한 방식으로 인권 이슈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단체는 항상 비슷한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그다음 문제는 사회적 공감대 형성의 문제다. 급진적 인권운동이 도덕적 이슈를 선점하고 편을 가르며 도덕적으로 협박하고 낙인 찍는 생태계가 만들어진 정당들은 사회적 공감 없이 무리한 변화를 강행하는 행태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유권자의 외면을 받고 선거에서 죽을 쑤곤 한다.

오바마도 그 사실을 아마 알았기 때문에 집권 초반에는 동성결혼을 “지지하지 않지만” 결혼제도에서 성 소수자를 소외시키는 “차별은 잘못”이라는 중도적 스탠스를 취했다. “동성결혼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오바마의 표현도 최근 문재인의 경우처럼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애초에 성 소수자의 시민권을 긍정하는 것과 별개로, 언제부터 정치인들이 성 소수자들의 문화 자체를 공개적으로 지지해야 한다는 도덕적 압력에 직면하게 됐는가?

사람들은 ‘성적지향에 대한 격려와 지지문제’와 ‘차별에 대한 찬반의 문제’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이게 대체로 SNS에서 성 소수자 이슈에 민감한 젊은이들이 가진 사고의 맹점이다.

그들은 문재인이 “동성애에 반대했다”는 표현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지만 정작 동성애 등의 성적 지향을 문화적 찬반의 문제로 만든 데 성 소수자 운동단체 자신들도 일조했다는 점을 잊고 있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소수자의 사랑일수록 더 아름답고, 더 숭고하고, 더 예쁘게 문화적으로 포장한 게 최근의 퀴어담론 아닌가? 퀴어축제에서 성 소수자 활동가들은 그들의 삶의 방식을 지지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들의 권리를 긍정하면서도 그들의 문화에 거리감을 느끼는 중간파도 있기 마련이다. 또한, 중간파에게도 ‘나도 동성애는 문화적으로 거북하지만, 차별은 안 된다고 생각한다’는 메시지를 통해 반대극단을 설득해야 하는 역할이 있다.

미국은 법원 판결을 통해 동성혼 합법화를 끌어냈다. 그러나 미국 연방법원의 동성결혼 합법화 판결은 좋은 모델이 아니다. 사회적 공감대와 합의보다는 위에서 내려꽂힌 변화에 가깝기 때문이다.

미국의 사회적 변화도 상당 부분 사회적 합의와 문화의 형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연밥 법원의 판결로 일어났다. 그리고 이것은 “법과 정책이 일단 바뀌면 나머지 사회적 분위기도 어떻게든 될 것”이라는 급진주의자들 특유의 ‘한탕주의 정서’를 만들어냈다.

일단 법과 제도부터 바꾸면 된다는 조급증이 앞서기 때문에 정치인과 언론 그리고 학자 등 유명인에게 압력을 행사하거나 안 되면 멱살부터 잡고 보는 태도가 생겨난다. 결국 정당 내에서 중간파를 축출하고 도덕적 근본주의자와 극단주의자들이 날뛰는 생태계로 바꿔놓는다.

<진보의 착각>(2014)이라는 책에서 비평가 크리스토퍼 래시는 진정한 의미의 공론이 없었던 미국의 사회변화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인종 분리 정책 철폐, 소수자 우대정책, 주민 수를 반영한 선거구 재조정, 낙태 합법화 같은 자유주의의 위대한 승리는 연방의회, 주의회, 국민투표가 아니라 주로 법원에서 쟁취되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이런 개혁을 뒷받침하는 여론의 합의를 만들어내기보다는 대중의 태도가 미덥지 못하다는 두려움에서 간접적 방식으로 자신들의 목표를 추구했다.(35페이지)”

또한 래시는 다음과 같이 리버럴의 태도를 비판한다. “알고 보니 좌파는 미래를 위해 싸운 것이 아니라 후지고 몽매하고 생각이 짧아 진보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싸웠다(33페이지)”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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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구성원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그냥 법과 정책을 위에서 내리꽂아서 사람들의 의식을 어떻게든 교화시키겠다는 급진적 리버럴들의 의식 수준을 한마디로 요약해주는 말이다. 변화를 대중의 머리 위에 내리꽂은 뒤에는 어떻게 되었는가?

트럼프가 나타났다.

후지고 몽매하고 생각이 짧아 진보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가르치겠다는 민주당이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사회적 합의와 여론화가 결여된 급진적 변화의 위험성을 경고하면, 대개 급진적 인권운동 단체는 ‘인권은 합의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마치 인권이라는 것이 시내 산에서 내려온 십계명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진 초월적 가치라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보편적 인권이라는 것은 일러도 20세기 중반에 UN인권헌장이라는 형태로 ‘발명’된 개념이고 역사적 개념이다. 그것은 사회 구성원들의 합의와 토론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다.

많은 인권운동 단체들은 미국식으로 소수의 급진파가 정당 내 도덕적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놓고, 법원판결로 각종 권리를 요행으로 성취해내는 것을 이상형으로 삼고 있다. 좋은 모델은 아니다. 아일랜드의 경우처럼 끈질긴 설득과 여론화 끝에 ‘국민투표’나 ‘입법’으로 동성혼 합법화를 끌어낸 것이 100만배 나은 모델이다.

결국, 사회변화에 필요한 여론의 임계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만만한 곳에 가서 상대를 혐오주의자로 낙인 찍는 방식은 적어도 중도 정당에서는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

지난 26일 국회 본관 '천군만마 국방안보 1000인 지지선언' 기자회견에서 문재인에 '동성애 반대' 사과요구 기습시위(사진=SBS)

문재인의 유세장에 한 성 소수자 활동가가 난입하며 후보를 위협했다고 한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더민주당이 급진적 인권운동의 일종의 ‘나와바리’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보수정당 유세 또는 대형교회에 난입해서 행사를 방해하면 얄짤 없이 형사고소·민사소송 들어오니까 그렇게 못한다. 오늘도 더민주당에서 난입한 사람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냈다. 잘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단호한 메시지를 보낼 필요가 있다. 그들의 방식은 중도정당에서는 통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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