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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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8 17:35 | 최종 수정 2020.12.14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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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썬 사건을 계기로 성별 갈라치기 조짐이 다시 보이고 있다. 얼마전 MBC에서는 “이번 ‘버닝썬 게이트’를 통해서 우리 사회에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성폭력 문화가 얼마나 일상적이고 만연해 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는 멘트를 보도했다.
정준영의 몰카범죄가 폭로를 통해 드러나자 일부 여성단체와 언론에서는 이를 통해 성대결을 재점화 하려는 것이다.
심지어 일각에서는 이번 사건을 남성들이 일반적으로 공유하는 강간문화(?)나 강간 판타지(?)가 발현된 사건으로 간주하며, 이를 통해 일상의 남성문화에 대한 죄의식(?) 주입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친다.
또한 이번 사건을 여성에 대한 범죄를 공유하는 남성 ‘카르텔’로 규정하기도 한다.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아무말 대잔치에 우려를 표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전가의 보도로 사용하는 남성 카르텔 프레임 아래서는 애초에 버닝썬 폭로 사태를 촉발한 폭행 피해자가 남성이었다는 사실, 그가 보복과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여성을 보호하려 했다는 사실, 그리고 단톡방 내용에 대한 제보자 역시 남성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무엇보다 남초 커뮤니티에서도 문제의 인물에 대한 높은 비난 여론이 형성됐다는 사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심지어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폭행사건이 터진 초기부터 버닝썬과 공권력(경찰)의 유착 관계를 의심해왔다.
만일 굳이 메갈리아식 남성혐오 프레임을 고수한다면 이번 사건에 대해서 ‘남성 카르텔’보다는 ‘자적자’라는 표현이 차라리 더 말이 될 지경이다. 물론 이런 단어를 유포하는 이들의 관심사는 애초부터 피해구제나 사안의 본질을 규명하는 게 아니라 막무가내의 남성혐오와 그와 결부된 개똥철학 설파이므로 이런 지적은 애초부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언론은 남혐 프레임에 휘둘리기보다는 대중에게 보다 정확한 정보와 진실을 전달해야 할 의무가 있다.
잠시 과거를 회상하자. 지난날 직원에 대한 갑질을 일삼고 불법영상 공유를 통해 이익을 얻어 물의를 일으킨 양진호 회장의 경우 내부고발자는 남성이었다. 하지만 이때에도 일부 ‘자칭’ 여성인권 단체에서는 갑질 피해를 당한 직원은 물론, 심지어 내부고발자까지 싸잡아 양회장의 ‘공범자’로 몰아붙인 바 있었다.
이들 역시 같은 사안에 대해서 어떻게 공익제보를 촉진할 것인지에 대한 관심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지금 ‘남성 공범자’ 프레임을 휘두르는 단체와 언론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유력 언론사와 권력유착 의혹이 제기된 고 장자연 리스트 폭로 사건과 이번 버닝썬 폭로 사건의 본질은 똑같다. 돈과 권력으로 심각한 범죄를 은폐할 수 있었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고 그것이 대중의 공분을 자아내는 대목이다.
단톡방에서 저토록 방약무인한 행동이 가능했던 데는 ‘어떤 짓을 해도 돈과 권력이 나를 보호할 것’이라는 믿음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카르텔을 유지시킨다. 이때 성별만으로 결성·유지되는 카르텔은 지구상에 존재한 바 없다.
참고로 버닝썬 사건에서 마약공급책 의혹이 제기된 인물과 버닝썬에 자금을 댄 거물 투자자 또한 여성이다. 심지어 마약 공급책으로 지목되었던 여성에게는 최초 버닝썬 폭행 피해자 남성에게 성추행 혐의로 고소해서 사건을 무마하려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이처럼 돈과 권력을 매개로 한 카르텔은 성별을 가리지 않지만 일부 자칭 여성인권 단체들만 그 사실을 모른다.
‘남성 카르텔’ 프레임은 현실에 존재하는 권력·자본 카르텔을 붕괴시키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실 버닝썬 사건은 역으로 이러한 카르텔에 균열을 일으키는 방법이 있음을 시사한다. 비열한 인간들의 틈바구니에서도 건전한 이성과 규범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혹은 모종의 이유로 그런 규범의 압력에 순응해서 폭로를 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아무리 비열한 인간들이 모여 있는 카르텔이라도 그들 사이에서 균열을 일으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특히 고립되고 소수파가 됐다고 느낄수록 내부고발자가 나오기 쉽다.
그런데 이 와중에 다수가 공유하는 규범과 이상을 재확인하기보다는, 인구의 절반의 가까운 집단에 ‘너도 똑같은 인간이 아니냐’고 손가락질하고 이들을 공범자와 동일선상에 놓는 담론은 사실관계에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가령 간호사의 자살 사건을 낳은 간호사내 태움 문화에 대해서도 간호사 집단, 나아가 여초 집단 전체를 싸잡아 비판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듯이 말이다. 중요한 건 그러한 문화를 바꿀 수 있는 유인을 제공하고 이를 위한 제도를 정착시키는 것이다.
가만히 보면 자신만의 ‘사적인 정의’에 취한 사람일수록 사회의 부정적 단면을 근거로 사회 전체를 정화해야 한다는 일부 히어로 영화 빌런의 공식을 그대로 답습한다. 이들은 모두 부분과 전체를 동일시하는 윤리적 궤변에 의존한다.
물론 (궁극의 PC주의자라고 생각되는) 마블 영화의 타노스처럼 궤변이 우주급 스케일이 되면 박력이 있고 캐릭터에 카리스마를 부여한다. 하지만 현실의 타노스 워너비들은 이보다 비루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젠더담론의 타노스화를 경계해야 한다. 비루하든 박력 있든 아무도 빌런이 궁극적으로 승리하는 결과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학 박사. 프리랜서 작가. '그 페미니즘이 당신을 불행하게 하는 이유'(2019, 공저), '포비아 페미니즘'(2017), '혐오의 미러링'(2016),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고유명'(2014), '일베의 사상'(2013) 출간. '2014년 변신하는 리바이어던과 감정의 정치'로 창작과 비평 사회인문평론상 수상과 2016년 일본 '겐론'지 번역.
박가분
paxwoni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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