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글 쓰는 ‘서연’입니다.
십여 년 전쯤 상담심리를 공부하고 싶었던 마음이 만들어준 인연의 선생님을 아주 오랜만에 만나게 됐습니다. 강산이 바뀔 만큼의 세월이 지났어도 어제 만난 듯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만남이었지만 변한 것이 있다면 이번에는 선생님과 학생의 관계가 아니라 상담자와 내담자의 관계였다는 것입니다.
그때 배움의 끈을 이어가지 못한 아쉬움이 마음 한 켠에 남아있었는데요, 어떤 간절함은 당장의 길을 막아서고 시간을 빗겨가게 하더라도 그 순도만큼의 또 다른 길과 시간을 열어 보여주는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의지로 어쩔 수 없는 일 앞에 억지를 부릴 것도, 마음보다 앞서 서두를 것도 없는 것 같아요. 공교롭게 이번 상담의 주제는 십 년 전쯤 선생님과 나눴던 고민과 다를 바 없었는데요. 다시 한번 세월이 무색하게 한 인간의 중심은 쉽게 무너지거나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부모와 자식 관계에 대한 상담을 중점으로 공부해오셨던 선생님은 특히 아버지의 역할-갈등을 깊이 있게 조명하는 식견을 갖추셨는데, 본인도 겪을 수 밖에 없었던 딸과의 문제의 사건들을 바탕으로 감정을 크게 이입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상담이 끝날 때쯤 내미셨던 책 한 권은 한 아버지의 아들을 향한 마음이 담겨있었지만 정작 필자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미스터리한 사건들을 흥미진진한 전개 속에서 맛있게 풀어나가는 일본의 대표적 추리소설 작가인데요, 그가 쓴 숱한 소설들 중 <기린의 날개>는 특별히 가족간의 유대와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휴머니즘적 메시지가 묻어나 좋아하는 작품이었는데 작가 스스로도 최고로 꼽은 적이 있습니다.
사건은 니혼바시 기린 상 아래에서 가슴에 칼이 찔린 채 살해된 다케아키로부터 출발합니다. 경찰의 추격을 피하다가 혼수상태에 빠진 용의자 후유키는 다케아키의 회사에서 산업재해로 해고된 적이 있어요.
얼핏 사건의 원인과 결과, 범인과 피해자가 분명해 보이지만 가가 형사는 본인 특유의 추리력으로 사건의 배후를 파헤쳐갑니다.
하지만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을 버리고 사실만 골라내다 보면 상상도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도 한다.
피해자와 용의자가 모두 증언할 수 없는 상황, 특히나 다케아키가 죽어가면서까지 기린 상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던 이유를 바탕으로 가가 형사는 피해자와 용의자의 주변인물(가족과 동거녀)들을 수색해갑니다.
다케아키의 가족들은 유대가 없다 싶을 만큼 서로에 대해 무감합니다. 아들 유토는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도 냉정한태도를 보일 정도고요. 다케아키가 후유키와 같은 계약직원들을 괴롭혔다는 비난에 맞서 아버지의 편에 서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아들 유토의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서서히 진실이 밝혀집니다. 유토는 중학생 시절에 수영부 친구들과 한 후배를 의식불명으로 만든 과오에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그 후배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블로그에 남몰래 방문하며 속죄의식을 품고는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쏟아질 비난과 질책을 극복하기엔 용기가 부족했고 남은 삶에 대한 두려움은 높기만 했기에 그저 종이학을 접어 신사에 받치는 것으로 진실을 은폐하고 있었죠.
그리고 가족이지만 가장 먼 거리에 있는 줄 알았던 아버지 다케아키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유토처럼 종이학을 접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서야 아버지의 관심과 사랑을 느낀 유토는 결심하게 되죠. 아버지의 뜻에 따라 남은 삶을 제대로 살아가기로.
용기를 내라, 진실로부터 도망치지 마라, 자신이 믿는 대로 하라.
후배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블로그의 이름이자 아버지 다케아키가 마지막 숨을 묻은 장소에 위치한 ‘기린의 날개’는 상상 속의 동물인 용과 같은 존재로 생각하면 되는데요. 현실 속의 동물로는 뱀, 이무기와 같은 상징을 띄고 있습니다.
성경에서의 뱀은 아담과 이브를 꾄 유혹의 존재이지만 승천한 용은 권선징악대로 인간 세상을 심판하는 초월의 존재로 생명을 부활시키는 재생의 이미지도 있습니다.
그러니 ‘기린의 날개’는 단지 아버지가 아들에게 띄우는 사랑의 메시지일 뿐만 아니라 죽음이 삶에, 영원의 세계가 유한의 세계에, 신이 인간에게 띄우는 경종의 메시지일 수도 있습니다. 길어 보이지만 결코 죽음보다 길리 없는, 어디까지나 유한한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아주 중요하고 소중한 메시지.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저지르지. 중요한 건 그 실수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야. 도망치거나 외면한다면 똑같은 실수를 다시 저지르게 되는 법이란다.
아무리 바른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들일지라도 그들에게 유혹이란 아직 오지 않았을 뿐 그 앞에선 어떤 실수를 저지를지 모를 나약함과 그 나약함으로 인해 저지른 실수를 직면하지 못하고 그저 은폐하며 살아가는 것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인 또 다른 하나의 나약함에 조금은 위로와 격려를, 또 조금은 충고와 지혜를 전해주는 문장들이 먼 하늘에서 가슴으로 내려 앉는 것 같았습니다.
용기를 낼 수 없는 이유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지만 그 감정을 끝까지 들여다보면 정작 실체는 없다는 것,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이라는 흐릿한 가면일 뿐 그 너머에는 두려움을 넘어서기에 충분히 반짝이는 빛이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을 잡기 위해 가짜에 속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거죠. 모든 나약한 인간들은.
하지만 그런 건 기나긴 인생에서 사소한 일이야. 자네들은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어.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라도 자기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되는 거야.
그 시절 선생님은 딸에게 어떤 잘못을 했었고 용서받기 위해 오랜 노력을 하셨습니다. 지금의 필자는 그 딸의 입장이고요. 간절함이 만들어준 지금의 인연이 시간도 이겨낸 기적이라면 어쩌면 상대의 마음 역시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을 간절함일 거에요. 그러니 그의 간절함 역시 또 다른 길과 시간을 열어주고 기적을 만들 겁니다.
그러나 그때가 소설에서처럼 날개를 달고 내려와야 하는 때일지도 모르니, 이 생은 유한하니, 그래서 우리는 완벽할 수 없는 것일 테니 저 역시 굳게 닫힌 마음을 서서히 열어볼까 합니다. 종이학을 접는 마음이 기다림에 지쳐 더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테니까요. 오늘도 늘어가는 하루만큼 혹은 줄어드는 하루만큼 삶을 배우는 서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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