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혼란 겪는 두 카멜레온은 어떻게 행복해졌을까

[리뷰] 저마다 제 색깔

서연 승인 2019.02.27 12:33 | 최종 수정 2020.06.30 14:04 의견 0
 

안녕하세요. 글 쓰는 ‘서연’입니다.

비가 오더니 비교적 따뜻했던 이곳 남쪽 지방도 제법 추워지며 한겨울 특유의 낮고 어두운 분위기가 어렸습니다. 되도록 외출을 피하고 방콕 모드로 있으려는데 대상포진에 걸린 엄마를 대신해 여기저기 들러야 하는 잔심부름 때문에 내복, 장갑, 목도리, 패딩으로 중무장을 하고는 열심히 돌아다녔습니다.

꽁꽁 싸맨 덕에 추위는 그럭저럭 견딜만했는데 무채색의 한산한 거리가 주는 쓸쓸함의 정서는 견디기 어려워 발걸음을 재촉하게 되더라고요. 눈이 보는 추위가 피부가 느끼는 추위보다 더 강력하고 무서웠던 거죠.

그러다 중요한 짐 하나를 오던 길에 들렀던 가게에 놔두고 와서 되돌아가야 했는데 그새 누가 가져간 모양이더라고요. 엄마에게 한 소리 듣고 나자 기분이 가라앉는 것은 물론 쓸데없이 감성에 젖어버리는 성향이 싫어지고, 잃어버린 물건의 금전적 손해까지 생각하니 절로 “왜 사니, 왜 살아” 소리가 나왔습니다.

“왜 사니, 왜 살아”
“왜 사니, 왜 살아”

‘나는 대체 왜 이 모양일까’ 하는 자책의 순간이 있죠. 뒤처지는 능력이든, 무성의한 노력이든, 타고난 본성이든 내가 가진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고 무엇 하나 내세울 만한 것이 못 된다고 가치 절하하게 되는 순간이요.

레오 리오니는 늦은 나이에 이르러 그림동화 작가가 되었는데요. 그의 책들은 따뜻한 메시지로 마음을 가만히 위로해주기도 하고, 기발한 생각으로 슬쩍 입가에 미소를 띠게도 해서 참 아껴보는 작가입니다. 오늘은 그의 책 <저마다 제 색깔>을 통해서 스스로가 미운 순간, 겨울 온도처럼 쨍하게 추운 순간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함께 나눠보았으면 합니다.

앵무새는 초록, 금붕어는 빨강, 코끼리는 잿빛, 돼지는 분홍으로 모든 동물은 저마다 제 색깔을 가졌는데 카멜레온만은 가는 곳마다 색깔이 변해요. 레몬 위에서는 노랑, 히드 풀섶에선 보라, 호랑이 곁에서는 줄무늬 색으로 말이죠. 카멜레온은 생각합니다.

레오 리오니 '저마다 제 색깔'
레오 리오니 '저마다 제 색깔'

나뭇잎 위에 있으면 나도 언제나 푸르겠지. 그러면 나에게도 나만의 색깔이 있겠구나.

그러나 늘 푸른 줄 알았던 나뭇잎은 가을이 되자 노랗게, 조금 더 후에는 붉게 변했기에 카멜레온도 똑같이 변해갔어요. 게다가 겨울바람에 날리는 나뭇잎 따라 날려가기까지 했고요. 검은빛 겨울을 지나 푸른 풀이 자라는 봄이 되어 다른 카멜레온을 만났습니다. 둘은 자신만의 색을 갖지 못하는 슬픈 사연에 대해 얘기하는데요. 나이가 많고 슬기로운 카멜레온은 이렇게 제안합니다.

우리 둘이 함께 있으면 어떨까? 어디를 가나 우리의 빛깔은 여전히 변하겠지만 너와 나, 우리 둘만은 늘 같은 색을 지닐 거야.

그 뒤로 둘은 늘 함께 있게 되는데요. 똑같이 초록, 똑같이 보라, 똑같이 노랑, 똑같이 붉은 바탕에 하얀 무늬가 됩니다. 그들이 처음 가졌던 고민은 고유한 자신만의 색깔이 없다는 것이었어요. 카멜레온이라는 동물의 가장 확고한 정체성 중 하나가 어디서든 변한다는 것이죠.

이렇게 확고한 정체성의 성질 자체가 확고하지 않아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없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함께 있다고 해서 근본적 문제가 해결될 리는 없는데요, 신기한 건 그들이 해결책을 찾은 듯 느낀다는 거에요.

이제는 괜찮아요. 그때부터 둘은 함께 행복하게 살았으니까.

레오 리오니 '저마다 제 색깔'
레오 리오니 '저마다 제 색깔'

괜찮다는 단어 속에는 참 많은 감정이 숨어 있는 것 같아요. 실의와 체념, 인내와 용서, 회복과 희망이 뒤섞인 오묘한 말 같거든요. 두 카멜레온의 감정이 이것 중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말을 뱉은 후의 변화입니다. 괜찮다고 여겼던 그때부터, 절대로 변할 수 없는 카멜레온의 특징을 인정하고 함께한 후부터 둘은 행복하게 살 수 있었어요.

돌이켜보면 내가 나라서 만족스럽지 않은 것은 진짜 고민일 수 없어요. 문제는 그런 나를 인정한 후 어떤 노력으로 어떤 변화를 도모해내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진짜 고민은 내가 나라서가 아니라 혼자라서 외롭고, 남들과 같지 않아서 초라하고, 이대로는 행복할 자신이 없어서 두려운 것이거든요. 자신만의 색은 결코 찾을 수 없어 근본적 문제가 해결될 리 없었지만, 함께 그 문제를 겪는 것만으로 괜찮아진 두 카멜레온처럼.

둘이 함께했더니 행복해진 두 카멜레온처럼 우리의 궁극적 문제는 쉽게 해결될 리 없는 성질의 것이더라도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일 겁니다. 그 충만한 행복 속에서 우리는 깨닫게 되겠죠. 무엇이 진짜 문제였고 무엇이 진짜 해결책이었는지를.

추운 겨울 뒤엔 반드시 따뜻한 봄이 오고 어두운 밤 후엔 밝은 해가 오르듯 괜찮은 감정 뒤엔 행복을 행복이라 여기는 앎이 와요. 그러니 미움과 자책, 인정과 노력, 변화와 긍정의 시간을 거칠 때까지 이대로의 나를 너무 미워하지 않기를, 쓸데없는 감성에 젖더라도 충만한 삶의 한 페이지가 되기를 바라며 저마다 제 색깔을 가진 세상의 모든 빛이 아름다울 3월을 기다리는 서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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