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글 쓰는 ‘서연’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를 소개할 때 하는 일을 드러내는 편은 아닙니다. 처음 ‘작가’라는 직함을 갖게 됐을 때의 송구스러움이 너무 생생해서(평소 동경하고 존경하여 삶의 스승이었던 작가들과 이름을 나란히 하기에는 스스로가 떳떳하지 못했던 거죠), 또 ‘작가’라는 이미지에서 자유롭고 싶을 때가 많아서(몰래 가진 비밀 하나의 즐거움이 얼마나 삶의 활력이 되는지 몰라요)인데요.
이런 이유에 숨은 공통적 감정은 두려움입니다. 위대한 대작가들의 천재성이 내겐 없을 거라는 자괴감, 그것을 들키면 창피할 수 있으니 한 발은 빼놓고 보자는 불안감인 거죠. 빼 논 그 한 발로 어디 갈 수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에요.
이럴 때 생각나는 작가와 작품이 있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입니다. 내용을 다 알고 있어서 계속 미뤄만 오다가 가장 최근에서야 읽게 된 고전 중 하나인데요. 새롭게 알게 된 내용은 없어도 생생하게 다가오는 느낌들은 있었습니다.
조르바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본능적’이라는 말이 딱 맞아요. 여자를 너무 사랑하고요, 순간에 너무 충동적이고요, 감정에 너무 충실합니다. 이를테면 이런 거죠.
새끼손가락 하나가 왜 없느냐고요? 질그릇을 만들자면 물레를 돌려야 하잖아요? 그런데 왼손 새끼손가락이 자꾸 거치적거리는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도끼로 내려쳐 잘라 버렸어요.
먹고 마시는 일이 곧 그 사람을 말해준다며 음식과 술에 환장하는 그지만 일에 집중할 때면 사나흘은 먹지 않고 그 일에 빠져듭니다.
여자라면… 젠장, 눈이 빠지게 울고 싶어집니다요. 두목, 당신은 내가 여자를 너무 좋아한다고 놀리지요. 내가 어떻게 이것들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래서 그는 비공식적인 결혼을 삼천 번쯤은 합니다. 읽다 보면 사람이 어쩜 이럴 수 있을까, 화가 나는 대목도 분명 있는데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가 가진 인생관을 드러나는 이 문장 하나로 모든 것이 정리되기도 합니다. 그간 숱한 책 속에서 무수히 배워왔던 “순간 속에 영원”이라는 진리를 몸소 실천하여 살고 있던 인물인 거죠.
모든 사물을 매일 처음 보는 듯이 대하고 두려움 없이 자신의 세상을 넓혀갔던 사람, 작가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영혼에 깊은 골을 남긴 실존 인물 조르바가 그토록 매력적일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미친 듯이 삶을 사랑한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좋은 사람이든 나쁜 놈이든 나는 불쌍해요. 모두가 한가집니다. 태연해야지 하고 생각해도 사람만 보면 가슴이 뭉클해요.
기쁘면 춤을 춰야 하고, 슬프면 눈물 흘려야 하고, 오늘의 오감으로 세상을 경험하던 그에게 삶은 곧 인연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묶인 줄을 잘라야만 인생을 제대로 살게 된다던 그는 자유를 선택하고 또 한 번, 다른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떠나요. 조금의 두려움 없이.
읽었으니 피부에 스몄고, 피부에 스민 그 감각들을 느꼈고, 느꼈으니 이젠 행동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잃고도 세상을 이겼다고 생각한 조르바와 조르바를 통해 생에 진정한 행복을 배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마지막 축제 속으로 필자 역시 뛰어들어 보려고요. 빼 논 한 발에 삶을 향한 사랑을 듬뿍 담아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두 발로 폴짝 뛰어드는 ‘서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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