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정신에 못 살겠어”

[서연의 러뷰레터] 가장 보통의 연애

서연 승인 2020.10.20 12:39 | 최종 수정 2020.10.20 13:20 의견 0

헤르만 헤세는 사람들이 술에 취하는 이유가 진정한 자신으로 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를 현대 버전으로 수정하면 ‘이번 생은 망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조금 순화해서 말하자면 지금 이대로의 자신은 도무지 마음에 안 들기 때문인 거죠.

맨정신에 못 살겠어.

결혼식 문턱에서 파혼당한 재훈은 그 후로 맨정신엔 못 살겠어서 밤마다, 때로는 낮에도 술을 마십니다. 선영은 그런 재훈이 예전의 자신 같아서 짠하기도 하지만 아직도 여물게 익지 못한 미숙함이 한심하기도 합니다.

가혹한 시련과 반복되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나이 먹어가는 서러움, 의지할 곳 없는 외로움. 그 틈에서 어떻게든 살아가려면 감정들이 모여 사는 마음 한쪽 문은 활짝 열어 두고 살아가야 해요.

바람 한 점 휘 불면 먼지처럼 날아가도록. 그럴 만큼 냉정하지 못하다면 매일 술에 취해라도 살아가는 것이고요. 맨정신에 못 살겠으니 술기운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서늘할 정도로 쿨한 사람은 마음 한쪽 문을 활짝 열어 두다 못해 아예 떼어 내어내 버린 사람이에요. 그렇게 하기까지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들로 누구보다 많이 울어봤던 사람이고요.

이들도 술을 마시면 체온이 후끈 달아올라서 집 나갔던 감정들도 따끈하게 데워진 마음 방 안에 다시 들어옵니다.

나랑 게임 하나 안 할래요?

그렇게 취중 게임이 시작돼요. 맨정신으론 안되겠으니 술기운으로, 진심 어린 대화는 위험하니 게임으로. 소리 없이 입 모양만으로 상대방의 말을 맞추는 게임을 먼저 제안했던 선영은 계속해서 지는 바람에 벌주를 마시지만, 사실은 ‘척’하는 중이었어요. 취한 척. 그러고는 주사를 시작하죠. 진실인지 거짓인지 모를 모호한 취중 언행을.

이게 서늘할 정도로 쿨한 선영의 방식이에요. 데일 만큼 데어 봐서 이제는 쿨하다 못해 서늘한 것 같지만 사실 그녀라고 별다른 방법이 있는 건 아니에요. 나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는 소심한 성질이긴 해도 대범한 가장을 곧 잘 하는 법이거든요. 대부분은 깜박 속지만 꼭 들키게 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그 둘은 사랑에 빠지거나 전쟁이 시작되죠.

센 척은 혼자 다 하더니 바빠죽겠지? 도망치느라고. 막상 일 터지니까. 뭐가 그렇게 무서워. 좀 이제 그만하고 용기 좀 내면 안 돼?

어릴 때는 술기운에 하는 모든 행동이 안 좋게 보였어요. 고백, 스킨십, 주사, 언쟁, 시비, 싸움, 눈물···. 취중진담이든, 취중수작이든 비겁하고 치사하고 무례하고 가벼워 보였어요. 나이 들어보니 술기운을 빌린 그 행동들이 맨정신엔 도저히 불가능했던 것들에 대한 용기이자 살아보고자 하는 나름의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남녀 관계, 지루하고 괴롭거든요. 둘은 다른 행성에서 온 존재라 호기심과 신비함으로 서로를 이끌지만 결국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할 수 없는 외계인이 되어 다툼을 반복하게 됩니다. 사랑이 이런데 직장은 뭐, 삭막하죠. 소문이 모여 한 사람 따돌리고, 퇴사시키고, 매장까지 시킬 수도 있는 게 현실입니다.

그래서 용기 낼 수 없는 상황 속에선 맨정신보다 반쯤 나간 정신이 승리하는 거에요. 술기운에 완전히 남이었던 나와 적이 섞이고, 저이와 그이가 엮이고, 안과 밖이 통하고, 그렇게 몇 잔 파도 타면 오해를 넘어 이해에 달하게 됩니다.

영화 '가장 보통의 연애'
영화 '가장 보통의 연애'

<가장 보통의 연애>의 영어 제목 <crazy romance>는 흔한 반어적 표현만은 아니에요. 우리가 사는 세상이 반쯤 나간 정신력으로 투쟁하지 않으면 절대 살아갈 수 없을 만큼 치열한 전쟁터라면 ‘crazy’한 상태가 가장 흔한, 정상적인, 보통의 상태이니까요.

맨정신에 못한 얘기도 하고, 집 나간 감정들도 들어오고, 잃어버린 용기도 되찾고, ‘절대’라는 수식어를 붙일만한 모든 상황과 형상들이 흐릿하게 허물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내 안에 들어오는 거에요.

그렇게 다시 사는 거예요. 절대로 사랑 같은 건 하지 말아야지 했던 결심 따윈 잊어버리고 활짝 열어 둔 마음의 한쪽 문, 행여 감기라도 걸릴까 닫아줄 그 사람에게 의지하면서요.

이 과정들이 결코 쉽지만은 않겠지만 갑옷 입은 채 방어적으로 시작했던 취중 게임이 가장 아껴둔 한마디의 취중 진담이 될 때까지, 질문과 답이 일치할 때까지 가보는 거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선영이 재훈에게 다시 한번 게임을 제안했을 때 처음과는 달리 완벽하게 대화가 이뤄진 것처럼요.

보고 싶었어.

나도 보고 싶었어.

헤세가 말한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에는 내 노력만이 아닌 그 사람의 손길과 약간의 도수 높은 알코올이 종종 필요한 것 같습니다. ‘잔’은 부딪쳐야 ‘짠’ 소리가 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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