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글 쓰는 '서연'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운명적 일들이 아니라면 보통은 자신의 의지가 삶의 모양을 결정짓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미 일어난 일을 없던 일로 바꿀 수는 없지만, 그 일에 대한 반응은 온전히 내게 달린 일이니까요. 제 발목 잡는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인 거죠.그런데도 사람은 참 쉽게 변하지 않아요. 실수할 것을 알면서도 하고, 한번 했던 실수를 되풀이할 때도 있고, 그렇게 계속 실수를 반복하는 와중에도 다음번에 같은 실수를 하고 말 거라는 사실을 예견하며 자신을 참 미워하기도 하고요.
이렇게 나를 위해서도 절대로 변할 수 없었던 내가, 누군가를 위해, 또 누군가에 의해 바뀔 수 있다는 것, 그렇게 변한 내가 그 사람의 무엇이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존재의 가치와 여한 없는 삶의 행복을 느끼는 것. 분명한 한계점을 가진 인간이 이뤄낼 수 있는 최고의 기적이란 이런 게 아닐까요?
영화 <노트북>의 두 주인공, 극과 극의 성격, 환경, 미래에 매일 싸우고 시비를 걸었던 노아와 앨리는 그러나 서로에게 미쳐있었다는 것 하나로, 그 사랑의 강력한 속성 하나로 사랑의 반대편에 선 불리한 조건들을 모두 누르고 불가능한 것들을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냅니다.
난 멋지고 화려한 걸 가질 수 없어. 그런 건 내게 ‘불가능’한 일이야.
노인성 치매는 회복 ‘불가능’해요. 퇴행성이거든요.
과학이 포기한 곳에 ‘신의 손길’이 내린다.
기적이라고 하면 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여기기 쉽지만 혼자라면 “불가능”했을 보통의 사람들이 함께일 때 이뤄내는 특별한 무엇, 그 알 수 없는 힘의 신비를 일컫는 거겠죠.유전자에 각인된 회귀본능으로 왔던 곳으로 떼를 지어 돌아가는 새들의 귀향 역시 함께이기에 가능한 일이고, 어떤 논리로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지만, 그 신비를 그냥 믿으면 다른 이유를 모두 누르고 그저 당연하게 여겨지는 자연스러움인 거죠. 그래서 더 아름다운 것이고요.
무책임하고 속수무책인 길을 사랑하니까 기꺼이 할 수 있다는 믿음, 서로에게서 인생을 배우고 사랑을 통해 성숙할 수 있었던 수많은 나날, 찰나의 영원 속에서 피어나는 불꽃 같은 빛의 잔해에 대한 기억. 그 안에서 결코 잃을 수 없는, 언제고 다시 돌아오는 집처럼, 죽음 너머에서 다시 만나지는 인연처럼, 다시 타오르는 사랑을 그린이 영화의 마지막 대사는 “잘자. 다시 만나”입니다.
결코 쉽지만은 않았던 생의 마지막 밤에 앨리는 “우리의 사랑이 우리를 함께 데려갈 수 있을까?”하고 물어요. 노아는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그 대목에서 들었던 생각은 “사랑이 먼저일까, 사람이 먼저일까?”였는데요, 아마 “달걀이 먼저일까, 닭이 먼저일까?”와 같은 질문일 거에요. 사랑이 그들을 서로에게 인도해주었다는 해석도 로맨틱하지만 그들의 존재에서 시작된 작은 씨가 서로로 인해 사랑으로 피어났다는 해석도 의미 있죠.
보통의 날을 기적의 빅 데이로 여겼던 노아와 안정된 삶을 버리고 그를 선택했던 앨리는 다음 날 아침 손을 꼭 잡고 영원한 꿈속에 빠지게 됩니다. 진짜 집으로, 왔던 곳으로 한날한시에 돌아간 것이죠. 사랑의 힘이, 그리고 그들의 힘이, 죽음 너머의 세계에까지 그들을 함께 데려간 것인 거죠.
날 위해 살아주지 않는 나를, 실수투성이에 변하지 않고 보통만한 크기로 사는 나를 탓하지 마세요. 그것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몰라요. 아직 때가 아니라 피지 못한 꽃을 나무랄 수 없잖아요. 좋은 바람, 쨍한 햇살 닿을 날을 기다리는 꽃봉오리처럼 좋은 사람, 쨍한 기적 피울 날을 기다리는, 아직은 불가능한 한 사람, 이제 곧 가능해질 두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일 테니까요.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존재일지라도, 무엇 하나 내세울 것 없는 평범한 삶이었을지라도 영혼 바쳐 평생 한 사람을 사랑한 적이 있는 한 그의 삶은 그 어떤 성공보다도 값지고 풍부한, 잃거나 잃을 수 없는 영원한 업적 하나를 이룬 것일 테니까요.
그 집 같은 한 사람 만날 때까지, 사랑의 기적을 기다리며 그 씨앗을 심고 가꾸는 5월 봄날의 '서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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