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수록 좋아지는 한국 소설 중 하나는 한강 작가의 것입니다. 독자들은 자신과 닮은 상처와 감정들을 소재로 삼아 세심한 언어로 풀어내 주는 작가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필자 역시 어렴풋이 느끼고만 있을 뿐 정확히는 깨닫지 못한 삶에서 만났던 무수한 굴곡과 그이면 속에 숨겨진 의미를 한강 작가의 글 속에서 배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날이 갈수록 작가가 던지는 질문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게 되고 가장 가까운 답변을 구하려 노력하게 됩니다.
어느 책에서건 작가의 화두는 ‘죽음’과 관련한 것입니다. 가까운 가족의 죽음에서부터 남이지만 결국 나에게 되돌아오는 죽음의 여파까지, 결국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죽음은 삶과는 다른 차원에서 또 다른 삶이 되어 살아있는 죽음인 것 같았습니다.
삶의 정지, 끝으로서가 아닌, 다른 차원에서 다시 시작되는 삶이 여기 남아있는 삶과 어떻게 연결되고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 끈덕지게 생각하고 이를 이야기화해내려는 작가의 그 마음은 삶에 대한 희망이자 현재에 대한 믿음인 것만 같았고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태도는 죽은 이들을 기억하고 해마다 추도식을 올리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반대로 삶이 죽음에게가 아니라 죽음이 삶에게 해줄 수 있는 것들이 더 클 수 있습니다.
<흰>의 주인공은 자신의 탄생과 동시에 죽은 언니를 생각하며 지구 반대편의 나라로 떠나갑니다. 전쟁의 결과로 파괴와 복원이 공존하는 그 도시는 곧 언니의 죽음과 부활을 동시에 상징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와해되고 지구 반대편 거리만큼의 공간이 합쳐지면서 삶과 죽음은, 나와 언니는 처음으로 만나게 됩니다.
죽어가는 언니의 어린 육체 속엔 엄마의 부적 같은 한 마디
새겨진 탓에 언제고 스스로 부활될 수 있었던 것이지만 나의 몸과 삶을 통해서만, 내가 그것을 빌려줌으로써만 가능했다는 점에서 삶과 죽음, 하늘과 땅, 안과 밖, 어둠과 빛의 경계가 무너지고 고통을 내재한 사랑, 혹은 사랑을 내재한 고통의 언어 “죽지마. 죽지 마라 제발”이 실현되는 이 모든 이야기는 다름 아닌 기적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과 가까워지는 모순된 생을 살아갑니다. 앞날을 알 수 없기에 마지막 날이 될 가능성을 ‘언제나’ 갖고 있는 오늘, 그러나 죽음과의 만남을 통한 삶에 대한 생생한 자각은 마지막 날이 될지도 모를 오늘의 나를 새롭게 부활 시켜 이 생을 ‘언제나’의 첫날로 만들기도 합니다.
아무리 흰 것으로 덧칠해도 검정 얼룩과 검정 발자국은 그 흔적을 남기겠지만 그 무엇도 부정하지 않고, 작은 부정 하나마저 끌어안고 죽음을 닮은 것 같은, 이 차갑고 적대적인, 동시에 연약한, 사라지는,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삶을 통과하는 것만이 우리의 몫인 듯합니다.
인도 유럽어에서 텅빔과 흰빛, 검음과 불꽃이 모두 같은 어원이라는 것을 읽었다. 어둠을 안고 타오르는 텅 빈 흰 불꽃들 (중략) Blank, blanc, black, flame. 타오르지만 사그라들고 붉게 높이 승천하지만 다른 것들을 죄다 태우고 마는.
어둠을 안고 타오르는 텅 빈 흰 불꽃처럼 죽어가는 하루하루의 날마다 다시 부활하는 것, ‘죽지마’라는 부적이 아니더라도 ‘살고 싶다’는 기도로 허무한 생을 통과하는 것, 이것이 바로 죽음이 삶에게 주는 메시지인 것 같습니다. 오늘의 모순을 안고도 그것을 긍정하며 내일로 향하는 ‘서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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