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글 쓰는 서연입니다.직업상 많은 책을 읽고, 많은 영화를 보는데, 가끔은 구성이라고 할 만한 갖가지 기술들이 다를 뿐 그게 그 내용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읽고, 배우고, 다시 쓰는 사람으로서 회의가 느껴지는 순간이기도 하고 그래서 더 재미를 느끼는 순간이기도 합니다.진리는 하나라는 확신, 결국 사람의 마음이란, 사람의 존재란, 사람이 사는 세상이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을 얻는 것이죠. 모든 일이 그렇듯 반복에 반복이니 정체기일 수도 있지만, 그 반복들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작품들을 접하고 다시 새롭게 보고 받아들일 수 있으니 전환기일 수도 있습니다.일에서 느끼는 이런 상반된 감정은 그 일이 탐구하는 문화·예술적 내용에서도 고스란히 발견할 수 있으니 제대로 느끼고 있구나 싶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일상적 삶에서, 관계에서도 늘 포착하고 있고요.그 가운데 알고 있는 최고의 진리라 하면 일상의 행복, 순간의 영원, 유한의 무한인데요. 이를 담은 영화 <안녕, 헤이즐>을 며칠 전 음미하며 보게 됐습니다. 사실 누구보다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이 주제들은 감동적으로 다가오기 어려워요. 그런데도 주인공들의 젊음과 유머 때문이었는지 좋았습니다. 영화 <안녕, 헤이즐>병을 앓고 있는 두 사람의 사랑, 그리고 사랑 후에 남는 흔적이 스토리의 전부예요. 그래서 줄거리는 특별히 말할 게 없어요. 대신, 남자 주인공인 어거스터스가 여자 주인공인 헤이즐을 사랑하는 태도는 몇 번을 되돌려봐도 감동이었습니다.사랑은 본능과 같은 것이라 사랑에도 자격이 있다고 말하고 싶진 않지만 제 눈에 들어온 그는 적어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 아니 넘치도록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거든요.
네가 날 멀리한다고 해서 내 마음이 달라지진 않아. 날 멀리하려고 해봤자 헛수고라고.
보통은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 수줍어하거나 긴장하거나 조심스러워하기 마련인데 그는 아니에요. 그의 표정에는 세상을 다 얻은 듯한 환한 미소가 얹어져요. 마치 사랑을 고백받은 사람의 얼굴 같아요.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난 참 운이 좋아. 넌 너무 아름다워.
사랑할 수 있는 것이 행운인 줄 아는 것, 그러니 그는 꼭 사랑이 아니더라도 삶에서 승자가 아닐까 싶었어요. 사랑하는 법을 안다는 건 사는 법을 아는 거거든요.원제가 <the fault in our stars>인데요, 번역하면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입니다. 원작인 소설은 이렇게 출간됐습니다. 죽음을 전제로 한 삶은 그 유한성, 그 불안함에 치여 우리를 두려워하게 만들고 행복과 반대의 개념에 놓이게 하죠. 그래서 아픔, 슬픔, 눈물, 헤어짐 등을 ‘fault’라고 여기게 해요.그런데 반대로 아픔, 슬픔, 눈물, 헤어짐을 동반하는 행복, 사랑, 기쁨, 만남은 그 반대의 것들 때문에 그 순간을 기적으로, 영원으로, 무한으로, 천국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드물기 때문이죠.이 넓은 우주, 무한대의 가능성, 스쳐 지나갈 우연들 사이에서 꼭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하나의 마음으로 서로를 알아볼 기회를 얻기란···.그래서 그 인연을 우주적 이벤트라고도 하는 것일 테고요. 사랑이 오는 순간, 그것이 사랑임을 알아채는 것, 사랑이 곁에 머무는 순간이 다시는 없을 생의 절정임에 감사해하는 것, 그 익숙함이 당연한 것으로 바뀌지 않게 예민하게 깨어있는 것, 생생하게 느끼는 것, 넘치도록 이 사랑을 즐기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일테고요.먼저 세상을 떠난 그였지만 헤이즐의 추도사를 미리 작성해놓은 그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아요.
그 앨 사랑하는 전 행운아죠. 상처받는 걸 선택할 순 없지만, 누구한테 상처받을지 선택할 순 있어요. 전 제 선택이 좋아요.
넘치도록 사랑했으므로 물리적 시간이 비록 남들보다 짧았다 한들 물리적 차원을 넘어선 무한대의 차원 속에선 그 누구보다 넘치도록 살았던 어거스터스와 헤이즐. 두 사람의 대화 속에도 무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0과 1 사이에는 무한대의 숫자들이 있습니다. (중략) 물론 0과 2 사이라든지 0과 백만 사이에는 더 ‘큰’ 무한대의 숫자들이 있습니다. 어떤 무한대는 다른 무한대보다 더 커요.
정정하고 싶은 것은, 제목과 바로 이 대사인데요. 영화 <안녕, 헤이즐>두 사람이 암스테르담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샴페인을 마실 때 웨이터가 이렇게 말해요.
동페리뇽이 샴페인을 만든 뒤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빨리 와 지금 별을 맛보고 있어.
꼭 고급라벨이 붙어서가 아니라, 유명한 작가를 만나러 멀리 떠난 여행지여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샴페인 잔을 기울이는 그곳이 곧 별천지의, 살아있는 날 동안 가닿을 수 있는 하늘과 가장 가까운 천국이라는 거에요. 그러므로 한 독자에 의해 다시 정정된 제목은 <천국은 우리 안에 있어>입니다.또 수학적으론 2가 1보다, 백만이 2보다 훨씬 더 큰 가능성을 포함한 숫자이지만 누군가의 1은 다른 누군가의 100보다도 더 깊고 무한하다고 정정해야겠어요. 백만을 가졌대도 사랑하는 법, 살아가는 법을 모르는 누군가에겐 그 백만은 백만으로 끝나고 마는 유한의 수이지만 사랑과 삶을 아는, 기적이 기적임을 아는 누군가는 자신이 가진 고작 1만큼의 숫자 속에 무한한 소수점의 가능성이 별처럼 반짝이며 수 놓여 있다는 것을 알 테니까요.당신과 나 사이에 있을, 그 사랑 안에 있을 별천지의 순간, 그 순간의 영원을 익숙하지 않게, 새롭고 들뜬 기분으로 느끼려 매 순간 노력하는, 정체기와 전환기, 그 사이 어디쯤 놓인 서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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