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대격변의 시대다. 종이신문 구독자는 씨가 말라간다. 진득하니 잡지 정독하는 사람이 드물다. SNS 계정 하나하나가 미디어로 작동하는 시절이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전 국민이 유튜버이거나 실버, 골드버튼을 꿈꾼다.
이런 와중에 수용자는 정작 별 관심이 없는데 기사 작성자와 공급자들은 눈을 곤두세우는 속보 경쟁, 낙종참사에 목을 맨다. 자기들끼리 쓰는 일본 은어와 비인권적인 도제식 수업을 공유·전수하며 아무도 강요한 적 없는 인류적 사명을 자청해 짊어지는데 그런 그들을 두고 대중은 기막힌 조어를 만들어냈다.
이번 회차엔 기자가 쓴 책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그간 기자가 쓴 많은 책이 나왔고 나오고 있음을 안다. 일생 글로 밥 벌어먹는 이들이 내는 책이 무슨 대수인가 싶기도 하나 그는 좀 특이한 기자였고, 그가 기획한 여러 편집방향이 한국 종이신문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고경태라는 이름 석 자는 기자, 편집자 사이에선 유명짜하다. 일생을 편집기자, 편집장으로 살아온 그가 쓴 <굿바이, 편집장>을 읽었다.
일상을 성실하게 사는 대다수 생활인에게 편집기자와 신문, 잡지사 편집(국)장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은 지식이다. 필자 역시 그러했다. 그가 쓴 이 책 <굿바이, 편집장>의 전작 격인 <유혹하는 에디터>를 읽기 전까지는.
책 내용을 옮겨 정리하자면 편집기자는 신문기사의 제목을 뽑고 기사 크기와 배치를 조율하며 오, 탈자를 집어내거나(회사마다 다를 테지만 편집기자가 전담하는 경우가 있고 교정, 교열 기자를 따로 두는 경우도 있다) 외부 필자를 섭외하는 일을 한다.
그래서 그게 어쨌단 말인가, 라고 물으면 답이 난망하지만, 저자 고경태는 현재 한국 여론을 좌우하는 아이콘으로 군림 중인 김어준을 발탁했고(쾌도난담), 유시민이 한겨레를 절독하는 사태 중심에 있었으며(역사학자 한홍구, 소설가 서해성의 대담 코너 ‘직설’에서 천정배 전 법무부장관을 인터뷰했는데 제목으로 뽑은 단어가 큰 논란을 불러왔다), 소설가 김훈이 편집국장을 지낸 잡지사를 사퇴하게 되는 대담을 기획해냈다.
요즘엔 발행하지 않는 언론이 드문 신문 토요판을 최초로 기획해 안착시켰다. 한겨레 읽는 맛을 내게 해줬다는 평가의 ESC가 그의 작품이다. 이만하면 소개는 됐고 책 이야기를 해보자.
책은 재밌다. 스트레이트 펀치보단 잽을 주는 식의 글쓰기를 지향하는 저자의 글은 늘 경쾌하게 읽힌다. 그가 쓴 글을 보면 당대의 예능 PD로 유명했던 주철환 아주대 교수가 떠오른다. 언어를 쥐고 놀거나 배합해서 만들어내는 기발한 글로 유명한 주 교수처럼 저자 역시 독특한 조어, 랩 가사의 라임에 비길 만한 표현 등 감각적인 솜씨를 책에서 내내 발휘한다. 늘 섹시한 제목을 뽑아야 하고 그 기능을 특화하도록 훈련받은 편집기자 출신이라 그런가.
재밌는 방송을 책임지는 예능PD처럼, 그는 재밌는 신문을 늘 고민하고 궁리했다. 그런 결과물이 위에서 지나가듯 언급한 ESC와 토요판. 새로운 시도를 벌일 때면 비토와 반발에 부딪히는 게 모든 조직의 숙명인 모양이다.
정통 스트레이트 부서(정치, 사회부)출신 조직의 시니어 그룹이 선거를 앞둔 정치의 시절인 이유로(그런 시절이 아닌 적이 거의 없지만), 기존 신문의 제작 방침에 어긋난다고, 1988년 국민주 방식으로 창간된 자사의 정신에 위배된다는 까닭 따위로 그의 기획을 무산시키려 했다.
대표적인 예가 돌고래 제돌이 사연의 1면 게재. 마침 전날, 이명박 정부가 벌인 민간인 사찰 관련한 증거를 훼손하고 인멸했다는 내용이 밝혀진 참이었다. 돌고래 제돌이와 민간인 사찰 사건. 무엇이 한겨레, 나아가 신문의 보도가치에 적합한 주제인가. 논쟁과 갈등의 전모는 책에 수록돼 있다.
한홍구, 박노자, 김두식, 이진순, 문유석 등 그가 발탁해 기용한 필자의 면모도 다채롭다. 그 과정과 그들의 집필, 마감 버릇이랄까 루틴까지 책엔 흥미로운 내용이 가득하다. 이진순 필자가 ‘열림’이라는 코너에서 인터뷰한 채현국 효암고 이사장과 김민기 학전 대표 기사는 거듭 곱씹어가며 읽었던 기억이 있다.
모든 책이 그렇겠지만 <굿바이, 편집장>이 재미와 미덕만 가득한 책은 아니다. 중간에 그가 기획하는 노하우를 설명해주는 대목은 표현이 장황하고 하고픈 말이 만연해 산만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 부분을 왜 넣었나 싶을 정도였다.
반면, 눈이 갔던 챕터는 전설적인 신문인 장기영, 잡지인 한창기를 설명하는 토막글이었다. 백가지 생각을 늘 하고 산다는 한국일보 장기영 사주에 관한 찬탄과 구전은 익히 들었다. 사세가 많이 위축된 현 한국일보를 보면 안쓰러운 마음마저 든다.
잡지 <뿌리깊은 나무>의 한창기 사장 역시 빼어난 기획력과 영업력, 천부적인 언어감각으로 출판인들의 사표로 매김 한다고 알고 있다. 이 토막글을 키우고 늘려, 아니 이제는 흔적과 오래된 기록으로만 남은 공전절후 종이의 제왕들을 취재해 책으로 엮어내면 참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듯하다.
편집기자 출신으로, 그리고 전문신문사 경력 이직 출신으로 드물게 여러 보직과 요직을 거친 그와 그의 시절 이야기는 무겁고 아프지만 읽을 만하다. 그가 종이밥을 먹기 시작한 때의 일간지 신문기자의 위상은 어마어마했다고 한다. MBC와 KBS에서 보도부문을 키우고 기자들을 출입처에 넣으려 할 때 일간지 신문기자단에서 “방송기자가 기자냐?!”며 대거 반대했다는 일화도 있다.
저자가 하려던 다종다양 재기발랄한 기획을 멈춰 세우려 했다는 중심에 있었다는 정통 스트레이트 부서 출신 일군의 시니어 기자들의 오만한 얼굴이 그려지기도 한다. 힘깨나 쓰고 방귀깨나 뀐다는 곳을 출입하거나 취재해 쓰는 자들의 군림의식과 취재대상과의 동류의식은 상상을 초월한다.
최근에 한겨레 내부에서 빚어진 일종 내홍도 결은 다르지만 이런 맥락이 아닐까. 법무부장관의 비위와 부정을 시종 축소하고 경시해 보도하려던 편집국 간부들의 방침에 후배기자들이 연서명해 항의한 사태가 있었다.
이 사태 중심에 장관 후보자와 대학 동문동과인 편집국 고위 간부가 있다는 전언을 들었다. 말이나 될 일인가. 1988년 국민주 방식으로 창간된 한겨레의 정신이 있는데?
그 사명의식과 자부심이 얼마나 다대하냐면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한 저녁 자리에서 한겨레 시경 캡(사회부 소속으로 경찰서를 출입하는 사건기자들을 지휘, 통솔하는 위치. 서울지방경찰청 기자실을 출입한다), 바이스(캡을 보좌하는 노릇을 한다), 종로서 1진(종로경찰서를 출입하는 3~4년차 사건기자)이 있었는데 당시 구독하던 A신문과 비교하는 발언을 했다 멱살을 잡힐 뻔했다.
아무튼 근거 없는 기자들의 특권의식과 낡은 사고방식, 옛것이라면 병폐마저도 고수해야 한다는 인식은 바꾸고 바뀌어야 한다. 늘 새로운 시도와 기획을 벌이면서도 유연하게 조직원을 설득하거나 눈에 띄는 결과물을 내밀어 조직의 수긍을 얻었다는 저자의 기록은 참고삼을 만하다.
끝으로 책이 출간된 출판사 이야기를 해야겠다. 이 회사에서 최근에 팀제 개편이 있었고, 이에 따라 특화된 이름을 고수하다(예: 인문사회팀) 성과와 조직논리에 보다 부합하는 식으로 편집부서의 진용이 변모됐다.
출판계와 연이 없는 전문경영인이 대표로 취임했고 그에 걸 맞춰 모회사와는 다르게 성과연봉제를 도입했다. 시기는 다르지만 몇 년 전 회사에 노조를 만들려고 하자 인사상 불이익 등으로 대응했다.
사람을 자르지 않는다는 모회사의 대원칙도 출판 자회사에서는 무용지칙이라고 한다. 2년 동안 구성원의 80% 회사를 떠났다고 하는데, 모회사에서 지지고 볶아가며 재미있는 매체, 좋은 회사를 위해 싸우고 일한 뒤 그 과정을 책으로 엮은 저자는 저 살풍경한 상황을 알았을까.
그는 이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자리에서 물러났으니 무언가 행동해줄 것을 바라는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참고로 저자의 오래전 보직은 한겨레 출판국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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