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민 사무관을 기억하는가. 기획재정부 3년차 사무관 신분으로 청와대가 민영기업 KT&G 사장 선임 과정에 개입했고 기획재정부의 적자 국채 발행에 압력을 넣었다고 폭로한 사람이다. 그 일이 꼭 1년 전이었다.
비슷한 시기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근무한 김태우 수사관의 폭로와 맞물려 그는 반정부 최전선에 선 내부고발자로 널리 알려졌다. 이 일로 세간의 주목과 관심을 받았고 이를 견디다 못해 서울 관악구 봉천동의 한 모텔에서 자살시도를 벌이다 발견돼 거듭 화제가 됐다.
당시 정부는 신 사무관 주장에 즉각 대응했다. 고발 내용을 알 수 있는 연차와 급수의 직원이 아니었다고 했다. 여당에선 그의 신경정신적 병력까지 짚어 전부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일축했다. 조직에 적응하지 못한 철부지와 정권 심층의 비리를 폭로한 공익제보자 사이에 그가 있었다.
신재민 사무관이 책을 냈다는 소리를 들었다. 마침 전 주에 지인들과 신재민은 어디서 무얼 하나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비슷한 시기 폭로를 벌였던 김태우 수사관은 제1야당 공천을 받아 다가오는 4·15 총선에 출마한다고 했다. 신재민이 책에서 풀어낼 흥미진진한 내부고발 막전막후 이야기가 궁금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판이었다.
책 <왜 정권이 바뀌어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가>는 독살스럽고 악에 받친 후일담집이 아니었다. 첫장(Chapter)을 읽고 나서는 내용이 어려워 머릿속이 뒤숭숭할 정도였다. 전 직장을 향한 복수의 칼날? 이 정부를 두고 품은 비수? 그런 건 없었다. 일선 공무원들, 실무진들의 일종 실전 ‘How to’ 같은 느낌이었다.
책 전반은 상식적이고 학술적인 내용이 지배하고 간간이 신 사무관 자신이 겪은 부조리와 비합리적인 행정 절차를 썼다. 내각에 의한 행정부 운영이 아니고 박상훈 정치발전소장 저술 <청와대 정부>를 빌려와 청와대 중심의 행정 운영을 비판하는 식이었다. 갖은 험담과 인신모독, 자살 시도 같은 낯 꺼풀 뒤에 있는 진짜 신재민의 생각을 알 수 있는 책이다.
그는 특정 정부 임기만의 고유 문제가 아니라 오랫동안 구조적으로 적층된 행정부 전반의 병폐를 말하고 싶어 했다. 이를테면 앞서 이야기한 청와대 정부, 전문성 없는 공무원, 공부 안 하고 편리와 이권만 좇는 언론(인)의 문제 같은 것들 말이다. 언론의 문제 역시 행정부를 견제하고 때로는 공조하기에 한 장을 할애했다.
청와대 정부는 만연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짐작이 가지 싶다. 대통령의 행정활동을 단순히 보좌해야 할 청와대 비서실이 개별부처 고유 권한을 넘고 업무를 침범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그가 폭로한 ‘적자 국채 발행’ 사안 역시 해당 정책의 적합성이나 시기상 부합성보다는 기획재정부 공식 결재 절차가 아니라 청와대 행정관을 통해 명령이 떨어진 데 문제를 제기하고 싶어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본질은 감춰지고 일개 사무관이 그런 정책을 알 만한 수준이 아닙네 하는 곁가지가 부각돼버렸다.
실제 부처 장·차관, 실·국장이 내리는 영보다 청와대 각 수석실에서 부처 실무자 선으로 곧장 보내는 요청과 정책이 잦고 더 힘이 세단다. MB정부의 국무총리실 민간인 사찰 사건도 청와대 고용노동사회비서관실에서 제어하고 지시해 수행된 명령이다. 대통령이 나서서 인사권을 행사한 박근혜 정부 시절 문체부 체육정책국, 과장 건도 비슷한 맥락이다.
비선이라는 게 막후에서 꼭 엄청난 실력행사를 해야 정의되는 게 아니다. 공식 결재라인에 없는 누군가가 결정한 일이 정상적으로 시행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때 받을 피해 당사자는 국민이고 이에 따른 책임은 누구도 지지 않거나 엉뚱한 사람이 뒤집어쓰게 된다. 신 사무관은 “정부가 정책을 집행하거나 결정할 때 국민들이 이를 분명하게 알게 되”는 교과서적인 행정의 방향을 여전히 믿고 그렇게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어떤 장보다 ‘언론(인)’을, 그들의 낙후성을 서술하는 장이 눈에 들었다. 독자들도 공무원의 행정활동보다는 익숙해 집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책에 따르면 출입처에 드나들면서 해당 부처의 업무, 정책 내용 등을 공부하지 않고 보도자료만 받아 적는 이른바 기자 양반들이 수다하다. 그마저도 정확한 의미와 맥락을 담당자에게 거듭 묻는(사실 확인 과정이 아니고) 이들이 오늘도 글밥을 먹는다. 출입처 제도의 폐단 이전, 직업인의 자세 문제일 텐데 이와 달리 이권이 물린 문제는 이들의 움직임이 재바르다.
광고인지 기사인지 모를 글월들이 신문에 난무하고 언론사 내부 이익이 달리면 기사를 이용해 부처와 기업을 가리지 않고 홍보하거나 비판하기 일쑤라고 한다. 공부는 안 하고 이권에 달아 타자만 두드리는 사람을 기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건 셈속 빠른 타자수지 기자라고 할 수 없다. 신 사무관은 얼마 안 되는 재직 중에 그런 이들을 숱하게 목격했다고 증언한다.
그뿐 아니라 한 줌도 안 되는 지역 언론 권력을 남용해 접대를 받거나 공무원들에게 막말, 폭언을 일삼는 치들도 마주했다고 서술했다. 당시로선 생소한 방법으로 유튜브를 통해 직접 고발내용을 이야기한 내막에 언론에 대한 회의가 있었다고 고백한다. ‘적자 국채 발행’ 관련 건의 경우 상당한 공부가 필요한데 기자를 붙잡아 앉혀놓고 하나하나 설명하느니 차라리 국민에게 직접 소상히 설명하는 식이 맞겠다는 판단이었다.
폭로 사태가 터지고 1년,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를 더 하기로 한 그가 책을 낸 이유는 특정 세력을 위함도, 선거에 영향을 끼침도 아니라고 했다(공교롭게 책 출간은 4·15총선 며칠 전이었다). 짐작에는 ‘우리가 그 정도 바닥은 아니다. 적어도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나’란 마음 아니었을까.
그는 행정을 더 공부해 학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출판사 유튜브 계정에서 밝혔다.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살이 많이 내렸다.
신재민 사무관의 책 <왜 정권이 바뀌었어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가>를 읽으며 혹시 그와 인터뷰 한다면 무얼 물어볼지 생각했다. 우선 책 전반에서 느껴지는 그의 내공에 관련 자료와 당시 상황, 그에 얽힌 일들을 열심히 공부할 테고, 우리 사회 최우선 과제를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질문지에 넣고 싶다. 그라면 아마 5분쯤 혼자 답변을 쏟아내지 않을까.
똑똑한데 생각까지 바르고 넓어 마치 오래 알고 싶은 선배가 어렵게 지은 책. <왜 정권이 바뀌었어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가>는 그런 느낌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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