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은 사랑으로부터 비롯된다

[서연의 러뷰레터]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서연 승인 2020.09.29 13:43 | 최종 수정 2020.09.29 20:05 의견 0

행복에 연연하지 않는 아이, 기적을 믿지 않는 아이, 모르고 지내는 게 더 나은 일들이 많은 나이, 그러나 무얼 하기에 너무 어려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아이.

자기 앞의 생(에밀 아자르 지음/ 문학동네 출판)
자기 앞의 생(에밀 아자르 지음/ 문학동네 출판)

존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 좌표와 흐름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어도 우리의 삶이 진정한 삶이 되게 하는 필수요소는 사랑임을, 언제나 사랑임을 알고는 있지요. 설령 아닌 순간에도, 아닌 선택을 하는 순간에도, 그 사랑과 자기 앞의 삶을 망치고 싶지 않아 다른 선택을 할 뿐, 사랑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죠.

자신의 부모, 나이, 생일조차 알지 못하는 모모는 로자 아줌마의 사랑과 하밀 할아버지의 배움을 통해 자랍니다. 그러다 로자 아줌마가 누군가로부터 매월 말 받는 우편환 때문에 자신을 돌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돼요. 그건 모모 생애 최초의 커다란 슬픔이었습니다. 울면서 뛰쳐나온 모모는 하밀 할아버지를 찾아가요. 그리고 이런 질문을 합니다.

“할아버지,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할아버지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몸에 좋다는 박하차만 한 모금 마실 뿐이었다. (중략)
“그렇단다.”
할아버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다.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자신을 찾아오는 엄마가 없어도,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성숙한 탓에 학교에서 받아주지 않아도, 생이란 것이 원래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아버려 달관한 듯해도 이런 순간엔 눈물이 나오는 거죠.

끔찍이도 사랑했던 강아지를 500프랑에 팔아버린 후 그 돈을 하수구에 버렸던 순간에도, 조금도 마음에 들지 않은 남자가 아버지일 가능성을 품었던 순간에도, 로자 아줌마의 병이 다행히 암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던 순간에도, 그러나 식물처럼 굳어가는 순간을 목격한 순간에도 모모는 눈물을 보여요.

암만 생각해도 이상한 건 인간 안에 붙박이장처럼 눈물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원래 울게 돼 있는 것이다.

생애 최초의 슬픔을 겪은 후 모모는 아마도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되었을 거에요. 그리고 혼란스러운 감정 속에서 누군가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물건을 슬쩍 훔치면 된다고 생각하며 행동에 옮기죠. 그런데 식료품점에서 달걀을 훔치던 날, 세게 뺨을 올려 붙여줄 것을 기대한 것과는 달리 여주인은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달걀 하나를 더 얹어주는 것이었습니다. 뽀뽀도 함께요.

한순간 나는 희망 비슷한 것을 맛보았다. (중략) 그때 내 나이 여섯 살쯤이었고, 나는 내 생이 모두 거기 달려있다고 생각했다. 겨우 달걀 하나뿐이었는데.

이 문장 참 예뻐요. 겨우 달걀 하나뿐이었는데 내 생이 모두 거기에 달려있다고 생각했다는 것. 이건 모모가 어려서 그런 것이 아니니까요.

낡고 헤지고 예쁘지 않아 낮고 어둡고 쓸쓸한 곳에 버려지는 쓸모없는 것들에 생명을 부여하는 것은 결코 커다란 선행이 아니라는 것을 이 문장에서 봅니다. ‘겨우’라고 할 만한 달걀 하나, 체온이 담긴 손, 쓰다듬어주는 손길, 볼에 닿는 주름진 입술, 바라봐주는 눈길, 따뜻한 말 한마디와 같은 것들이 꺼져가는 불길을, 시들어가는 꽃잎을 살리듯 생명을 살려요.

이미 결정지어진 운명은 너무도 거대하고 강력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것 같아도 거대한 운명보다 ‘겨우’인 작은 것들이 때로는 더 큰 힘이 있다는 것이 이 문장에선 보여요. 그래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이런 구원은 감히 기적이라 할 만한 것이겠죠.

로자 아줌마가 우편환을 받았다는 사실을 안 것이 생애 최초의 커다란 슬픔이었다면 달걀 하나를 훔치고도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안 것은 생애 최초의 빛나는 희망이었던 거에요.

그 후의 현실은 여전히 혹독하지만, 모모는 상상 속의 인물들을 통해 희망을 키우고 꿈을 그려요. 광대, 빅토르 위고, 암사자, 아주 먼 곳을 머릿속에서 자꾸만 불러내요. 이런 상상은 현실에서도 이어지는데 나딘 아줌마의 녹음실에서 거꾸로 가는 세상을 만나게 되는 게 그것입니다.

거꾸로 된 세상, 이건 정말 나의 빌어먹을 인생 중에서 내가 본 가장 멋진 일이었다.

왜 아니겠어요. 비워졌던 잔에 물이 차오르고, 말들이 뒤로 달리고, 뱉은 침은 입속으로 들어가고, 팔층에서 떨어졌던 사람이 살아나서 창문으로 돌아가는 것을 처음 본 아이에게는 신세계와 다름없죠.

그러나 모모에게 거꾸로 된 세상이 최고의 장면이었던 진짜 이유는 로자 아줌마를 튼튼한 다리로 서 있는 생기 있고 아름다운 처녀로 만들어줄 수 있다는 데에 있어요.

모모는 이때도 눈물을 흘려요. 이때 모모는 신기한 체험을 하는 데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엄마라고 확신할 수 있는 여자가 자신의 앞을 지나가는 것을 봅니다.

모모의 이런 상상이 삶에 대한 희망이고 미래라고 한다면, 로자 아줌마의 망상은 과거에 매인 멍울이고 퇴행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세상에서 가진 것이라고는 서로밖에 없었음에도 서로를 지켜낼 수가 없어요.

로자 아줌마의 시간은 과거로 역행하고 있었고 종착지는 삶의 반대인 죽음이었지만 모모의 시간은 미래로 향하고 있었고 목적지는 자기 앞의 생, 희망, 꿈이었으니까요.

삶의 끝에서 로자 아줌마가 무서워하자 모모는 이렇게 말해줘요.

“그게 바로 살아있다는 증거잖아요.”
“정말 냄새가 나는구나.”
“그건 아줌마 몸속의 기관이 아직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예요.”

모모가 출생에 대한 비밀과 존재에 대한 고민으로 혼란에 빠졌을 때 하밀 할아버지는 이런 말을 했어요.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

하밀 할아버지로부터 삶을 배웠다고 믿는 모모가 이제는 로자 아줌마에게 그 가르침을 되돌려준 것 같아요.

그리고 이제는 눈도 어둡고 정신도 오락가락한 하밀 할아버지에게는 다음과 같은 대화로 빚졌다 믿는 삶을, 삶의 지혜를 되돌려줍니다. 먼저 모모는 그때와 같은 질문,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도 살 수 있나요?”을 던져요. 이번에도 할아버지는 다른 말로 화제를 돌리는데요.

“제가 어릴 때 할아버지가 그러셨잖아요,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그의 얼굴이 속에서부터 환하게 밝아졌다.

부류가 다른, 계급이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이미 알았고, 신과 삶이 내 편이 아니라는 사실도 체념하듯 진작에 받아들였지만 로자 아줌마가 죽고 난 후, 나딘 아줌마의 가정으로 가게 된 모모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사랑해야 한다”입니다.

이 책의 후문에 ‘슬플 결말로도 사람들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이라는 제목의 글을 곱씹어 읽어보다 그 아래 이렇게 적었습니다. ‘우리의 슬픔은 사랑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이라고.

생은 어쩔 수 없이 우리를 파괴해 가겠지만 죽고 싶어질 때 더 맛있어지는 초콜릿, 기분이 별로일 때 더 달콤해지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처럼 곁에 둘 누군가를 가질 수 있음에, 그의 손을 꼭 잡고 걸었던 생의 모든 시간을 기억할 수 있음에, 삶이 꼭 검은색만은 아닐 거라고.

생은 죽어가는 로자 아줌마에게 기쁨을 주었던 새빨간 꽃 한송이, 제정신을 잃어가는 중에도 두 손에서 놓을 수 없었던 하밀 할아버지의 빅토르 위고의 책과 같은 희망인 거라고. 그러고 보니 모모는 아주 기분이 나쁜 어떤 순간에서도 이런 말을 했었네요.

"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닌 순간에도, 아닌 선택을 하는 순간에도 알고 있었어요.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요. 어제보다 요만큼 씩, 그렇게 하루만큼, 지혜가, 사랑이, 그래서 우리 앞의 생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닌, 기적이 되기를 감히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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