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솔로’가 흥하면서 관련 콘텐츠들이 많이 생겼다. 누군가는 방송에 나온 이들의 모습을 연애 교보재로 삼기도 하고, 누군가는 이들의 심층적 심리를 파헤치기도 하고, 누군가는 방송 뒷이야기를 다룬다. 필자는 이 중 무엇도 아니다. 연애 전문가도 아니고, 심리 전문가도 아니다. ‘나는 솔로’의 애청자이긴 하지만 뒷이야기까지 알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필자는 출연자다. 솔로 나라에 가봤다. 첫 인상 투표에 0표도 받아 봤고, 데이트도 나가 봤고, 최종 선택도 해봤다. 그래서 안다. 솔로 나라라는 공간은 어떤 곳인지, 어떤 사람들이 이 곳에 오는지, 여기에서 사람들은 어떤 모습을 보이게 되는지를 안다. 연애나 심리, 출연진의 비하인드는 잘 모르지만 필자는 솔로 나라를 안다. 그래서 써보려 한다. 미리 말해두지만 필자는 연애나 심리 전문가가 아닌, 그냥 전 출연자이자 현 애청자일 뿐이니 너무 진지하게 읽지는 말도록 하자.
‘나는 솔로’ 12기의 출연자 광수는 포항공대 수학과를 졸업했으며 지금은 4년차 변리사로 일하고 있다. 모태 솔로를 탈출하고 첫 연애를 하기 위해 솔로 나라에 입국하게 됐다.
이 곳에서 그가 마음에 둔 여자는 옥순, 30세의 임용고시 준비생이다. 광수는 처음 등장하던 옥순의 캐리어를 끌어주던 순간부터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었고, 옥순도 첫 데이트에서 광수를 택하면서 두 사람은 데이트를 하게 된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순조롭게 흘러가지 않는다. 옥순은 소심하고 낯 가리는 모태 솔로들 사이에서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하던 광수의 모습을 보고 광수를 택했지만 데이트에서 광수가 보여준 모습은 옥순의 기대와 달랐다.
너무 무거웠고 조급했다. 옥순이 광수를 택한 건 단순한 호기심이었지만 광수는 명확한 호감 표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첫 데이트부터 옥순에게 확답을 요구했다. 서로의 마음의 속도가 다르다는 걸 알아차리기에 그는 이미 옥순에게 너무 깊이 빠져 있었다. 결국 옥순은 부담을 느껴버렸고, 달아나버린다.
하지만 광수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다음 데이트에서도 옥순을 택하고, 신혼부부 상황극이라는 무리수를 던져버린다. 이에 옥순은 자기 방식을 강요하는 게 사랑이라고 생각하느냐며, 그만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한다.
이처럼 직접적인 거절 의사를 밝혔음에도 광수는 멈추지 않는다. 옥순에게 사과하겠다며, 이른 시간부터 몇 차례씩이나 여자 숙소로 찾아가 문을 두들긴다. 옥순이 나오지 않자 답답한 마음에 옥순에게 처음 데이트 신청을 했던 곳으로 가서 다섯 번(옥순은 여자 5호다) 종을 치기도 한다.
꼭 여기에서 모든 결론을 지어야 하는 건 아니다, 촬영을 마치고 두 사람의 감정이 충분히 가라앉은 뒤에 사과해도 늦지 않다, 옥순의 감정을 먼저 헤아려야 한다는 영철의 조언을 듣고서야 광수는 멈춘다.
이 행동으로 광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유튜브 댓글창에서, 심지어 개인 SNS에서까지 성난 네티즌들의 엄청난 악플 공세를 받게 된다.
왜 그랬을까. 만약 그날 아침 옥순이 일찍 일어나 있었더라면, 혹은 옥순이 광수의 부름에 응해주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광수가 그렇게까지 집요하게 하려 했던 사과의 말이라는 건 무엇이었을까.
필자가 그걸 알 수는 없다. 광수 본인만 알 것이다. 하지만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다. 필자도 집착이라는 걸 해봤기 때문이다. 28살때 첫 직장에서 누군가를 만났고, 좋아하게 됐다. 그 사람도 필자가 좋다고 했다. 그래서 연애를 시작하게 됐다. 돌이켜보면 별것 아니었다. 그 사람도 필자에 대해 잘 몰랐다.
신입사원 연수 때 수십 명 동기들과 선배 팀장들 앞에 자신 있게 나서서 장기자랑을 하고, 모두가 무서워하던 대표님 앞에서 재치 있는 프레젠테이션을 보여주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모습을 보고 나를 좋아하게 된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땐 그걸 몰랐다. 우린 운명이라고 생각했고, 내가 어떤 모습을 보여도 그녀는 나를 사랑해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모든 걸 보여주었다. 진로에 대한 고민, 부모님과의 갈등, 사회에서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는 불안한 모습. 아직 서로에 대해 충분히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굳이 알아봐야 서로의 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들을 너무 많이, 그리고 일찍 보여주었다. 그러다 헤어졌다. 한달 만의 일이었다.
이후에도 그 사람은 오랫동안 필자 마음 속에 남아있었다. 둘다 그 회사를 그만두어서 다시는 만날 일도 없게 됐고, 연락처는 차단당했지만 내 마음 속에는 여전히 그 사람이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한달 만나고서 그리워할 거나 있냐, 사귄 게 맞긴 맞냐, 너 혼자 사귀었다고 착각하는 거 아니냐고 했지만 그건 중요치 않았다.
그 한줌 밖에 되지 않는 기억들을 나는 머릿속으로 무한재생 시켰고, 그 기억들은 내가 지내온 어떤 한달보다도 뚜렷하게 남았다. 네가 했던 말 한 마디, 입고 있던 옷, 그날의 날씨까지, 읊으라면 읊을 수 있을 만큼. 5년이 지나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할 당시까지도 그랬다.
많이 좋아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신입사원 연수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예쁘다고 생각했고, 그런 네가 날 좋아한다고 했을 때 세상 모든 걸 가진 기분이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지인의 블로그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글을 봤는데, 그 말이 너무 예뻐서 나도 너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부르기로 했다는 말도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내 감정에 너무 취해 있어서 네가 어떤 감정일지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고, 서로에게 익숙하지 않은 사이에서는 너의 마음의 속도에 맞췄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몇 년 동안 너를 악착같이 기억하려 했던 이유는 그것이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났다. 신입 사원이었던 필자는 6년차 회사원이 됐다. 연애 프로그램에 나갔고, 작가로 데뷔했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나 따위를 사랑해주는 누군가를 만났다. 하지만 그 행운을 내가 걷어차 버렸다. 그 사람이 나에게 무언가를 잘못한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뭐가 부족했던 것도 아니었다. 외모나 조건, 성격 무엇 하나 부족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똑같이 한 달만의 일이었다.
그때 네가 떠올랐다. 나는 너를 사랑했다. 이전에 만났던 누구보다도, 어쩌면 그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더. 하지만 너는 나를 버렸다. 그건 나에게 큰 상처였다. 단순히 차여서 그런 게 아니었다. 회사를 그만두던 날 동기들과의 송별회식에 너를 초대했지만 너는 거절했다.
별 말 안 할 테니 그냥 잠깐 와서 얼굴만 보고 가라는 것도 한사코 거절했다. 이후에는 연락처까지 차단해버렸다. 나와의 모든 접점을 끊어버렸다. 부재중 전화를 수십통쯤 걸었던 것도 아니고, 장문 메시지를 보낸 것도 아니고, 집 앞에 찾아가거나 신상을 턴 것도 아닌데 그렇게 했다. 꼴도 보기 싫을 정도로, 넌덜머리가 났던 것이다. 그게 상처였다. 내 마음이 너에게 아주 작은 기쁨도 주지 못했다는 것, 오히려 부담감이라는 마이너스의 감정으로 남았다는 게 상처였다.
그래서 나는 너를 그리워했다. 네가 나를 다시 좋아하게 하고 싶었던 것도, 다시 만나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너무 나쁘지는 않았던 기억으로 남기고 싶었다. 너의 감정을 플러스로, 그게 안되면 0으로라도 돌려놓고 싶었다.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게 된다면, 내게 나쁜 뜻이 있었던 게 아니라 그냥 서툴고 어려서 그랬던 것뿐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렇게 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같은 입장이 되어보니 알게 됐다. 내 잘못이 아니었다는 걸, 그러니까 내 마음을 더 보여줄 필요도, 사과를 할 필요도 없다는 걸. 나는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리고 내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네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버린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내가 버렸던 사람은 충분히 좋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게 진심어린 마음을 준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필자를 힘들게 했던 건 바로 그 점이었다. 차라리 그 사람이 내게 나쁜 마음으로 접근했던 거라면, 외적이나 내적으로 큰 하자가 있었더라면 전혀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저런 여자로부터 벗어나서 너무 다행이라고 환호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좋은 사람, 고마운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게 힘들었고, 책임지지도 못할 관계를 너무 쉽게 시작해버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이 정도의 사람이 나를 이만큼 좋아해주는 행운이 쉽게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갈등했고, 그냥 사랑해줄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아서 힘들었다.
너도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악인이 아니라는 것도, 누구보다 너를 많이 좋아했다는 것도 충분히 알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래서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너를 진심으로 좋아했다는 걸 굳이 보여줄 필요는 없다. 그건 오히려 너를 더 힘들게 할 뿐이다.
광수도 그랬을 거라 생각한다. 기억 몇 개만 가지고 가 달라는 광수의 마지막 말은 너에 대한 나의 마음을 나쁘게만 기억하지는 말아달라는 뜻이었을 것이고, 옥순이 그 말에 날선 반응을 보인 건 역설적이게도 광수가 서툴지만 순수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광수가 그런 옥순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던 건 아직 옥순의 입장이 되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 그를 좋아해주는 사람을 만난다면,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도 알게 될 것이다.
물론 꼭 알아야 하는 건 아니다. 언젠가 그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는, 그리고 그도 그녀를 사랑하는 기적 같은 일이 그에게도 생기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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