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성 부르짖는 비주체적인 ‘상실의 세대’

[기획] 포스트 80년대 운동권의 문화대혁명

채서안 승인 2018.09.07 12:31 | 최종 수정 2020.09.24 14:01 의견 0

<글 싣는 순서>

  1. 페미니즘 광풍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각
  2. 주체성 부르짖는 비주체적인 ‘상실의 세대’
  3. 박근혜 정권의 판 뒤집기와 ‘상실의 세대’의 위기의식
  4. ‘상실의 세대’와 ‘페미피아’, 영혼의 단짝으로 만나다 1
  5. ‘상실의 세대’와 ‘페미피아’, 영혼의 단짝으로 만나다 2
  6. 홍위병 이끄는 ‘강청’이 되고픈 ‘상실의 세대’ 1
  7. 홍위병 이끄는 ‘강청’이 되고픈 ‘상실의 세대’ 2
  8. ‘상실의 세대’, ‘승리의 세대’를 검열하다 1
  9. ‘상실의 세대’, ‘승리의 세대’를 검열하다 2
  10. 모택동 자임하는 ‘유신·386세대 운동권 세력’
  11. ‘80년대 가치’ 맹종 아닌 필터링과 극복 요구하며 1
  12. ‘80년대 가치’ 맹종 아닌 필터링과 극복 요구하며 2

‘페미피아’들을 옹호하는 진보 성향 인사들을 살펴보면, 대략 두 부류로 나눠진다.

우선 ‘페미피아’들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반영하면서 이에 지지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동시에 그 반대 견해에 대해서는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는 인사들이다. 그보다는 옹호 수준이나 공격성은 상대적으로 낮은 대신 결국에는 ‘페미피아’들의 주장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논의를 이끌어 나가려는 인사들로 나뉜다.

전자는 각자의 견해 표명이 상당 부분 보장되는 신문 쪽에서, 후자는 그보다는 공정한 태도를 의식하는 방송 쪽에서 찾아지곤 한다. 하지만 그러한 언론 형태의 차이 외에도 이 두 경향은 세대에 따라 갈리는 듯한 양상을 보인다. 즉 전자는 80년대 후반 및 90년대 이후 대학 생활을 보낸 인사들에게서, 후자는 그 이전에 활동한 인사들에게서 주로 나타난다.

중앙대 이나영 교수(출처 이나영 페이스북)
중앙대 이나영 교수(출처 이나영 페이스북)

필자는 바로 이처럼 ‘페미피아’ 옹호가 두드러지는 전자 세대의 진보 성향 인사들을 ‘포스트 80년대 운동권 세력’으로 명명하고 이들에 대해 주목해 보려고 한다.

사실 필자가 지목한 이들 중 일부, 특히 80년대 후반 학번들은 90년대가 시작되기도 전에 일찍 학업을 마친 사례들도 적지 않기에, 이들을 ‘포스트 80년대’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80년대’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은 6월 항쟁과 제6공화국 성립 등을 통해 주로 형식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87~88년 이전이며, 그 이후의 사건들은 90년대의 분위기와 연결되는 경향이 많기에 이처럼 호칭해도 큰 무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80년대 후반 학번들의 경우 90년대 학번들에게 시기상 가까운 선배로서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경우가 적지 않기에, 이들을 같이 묶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판단이 나온다.

어느 세대나 각자가 사는 시대와 연관해 나름의 고민하고 있기에 각 세대가 짊어진 삶의 무게의 우열을 가리는 시도는 신중해야 하겠지만, 적어도 ‘학생-사회 운동’이라는 영역 안에서만 놓고 보면 ‘포스트 80년대’ 세대만큼 불쌍한 이들은 없을지도 모른다.

먼저 6월 항쟁을 통해 형식적 민주주의가 일정 부분 완성되면서, 학생-사회 운동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호응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더욱이 80년대 이후 지속된 경제 성장과 호황은 대중들이 학생-사회 운동에서 외치는 내용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의 몰락과 붕괴는 ‘자본주의·자유주의의 우월성’과 ‘사회주의·공산주의의 허상’을 알려주는 사건으로 인식되면서 학생-사회 운동에 상당한 타격을 안겨준다. 이제 한국 사회 안에서 학생-사회 운동의 영향력과 비중은 서서히 축소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학생-사회 운동은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의 여러 모순이 해결되지 않았다는 명분에 따라 자신들의 견해에 관심을 두게 하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때 87년 이후 보수 정권들의 교묘한 공안 정국 형성은 그들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주요 논거로 활용됐다.

하지만 이들에게서 나타난 과격하고 폭력적인 모습은 대중들의 호응을 얻어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학생 사회 안에서도 서서히 외면받는 결과를 초래했다. 96년 연세대 한총련 사태를 절정으로 학생-사회 운동은 자신들의 세계 안에서나 통용되는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해 나갔다.

사실 ‘포스트 80년대 운동권 세력’은 상당히 모순적인 모습을 지닌다. 이들은 민중·민족·계급 등의 자주·주체성을 강조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주체적인 모습을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주장은 앞선 유신·386세대들의 민주화 운동 중에 형성된 견해들을 답습했으며, 그에 대한 철저한 구현을 강조한다. 설령 그들 자신이 과거에 이것을 배우면서 의심을 했다고 하더라도, 80년대를 거치면서 형성된 선배들의 권위 및 논리 공격에 밀려 제대로 반항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그들은 선배들이 자신들의 오류를 바로잡아주었다고 기억하겠지만 말이다).

또한 ‘포스트 80년대 운동권 세력’은 승리·주도자라는 위치를 맛보지 못한 이들이기도 하다.

냉전 세대 선배들은 적어도 자신들이 ‘대한민국’이라는 신생국가를 만들어나갔고, 그 기초 마련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유신·386세대 선배들은 자신들이 ‘민주화’라는 한국 사회의 주요 과제를 자신들이 앞장서 이룩했다는 자부심이 있다.

그러나 ‘포스트 80년대 운동권 세력’은 그렇지 못하다.

필자가 이들의 일부로 지목한 80년대 후반 학번들은 6월 항쟁이라는 ‘승리’를 맛보기는 했으나, 그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자신들의 선배들이 주도하는 작업에 참여했다고 보는 편이 옳다.

물론 87년의 ‘승리’가 있었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형식적 민주주의의 구현이 이루어졌을 뿐, 유신·386세대 운동권 세력들이 80년대를 거치면서 연구했던 ‘80년대 가치’가 완전하게 달성되지는 않았기에, 그 몫은 ‘포스트 80년대 운동권 세력’들에게 넘어갔다.

그런데 80년대 말부터 등장한 사회 변화가 이들이 무언가를 주도할 기회를 빼앗아가 버린 것이다.

더욱이 유신·386세대 운동권 세력들이 만들어낸 ‘80년대 가치’는 더 깊이 파고 들어가면, 한국 외부에 있던 다른 진보 성향 운동들을 참고하면서 형성된 측면도 존재한다. 공산 진영 붕괴 이후 전 세계적으로 진보 성향 운동들이 새로운 변화에 대한 대처로 고민하던 상황이었기에, ‘포스트 80년대 운동권 세력’들은 선배들의 견해를 고수하는 방법 외에 다른 길을 찾기 어려웠다. 90년대를 거치는 동안 ‘포스트 80년대 운동권 세력’들은 계속되는 ‘상실’을 경험한다.

우선 앞에서 언급한 대중과 학생 사회의 외면으로 이들은 제대로 된 사회 리더로의 경험을 가질 수 없었다. 80년대 이후 경제 성장 및 호황을 직접 누리는 같은 세대 동문을 지켜보고 학생-사회 운동에 대해 회의감을 가지면서 다른 분야로 옮길 결심을 해도, IMF 사태 이후의 경제적 어려움이 찾아오면서 그러한 기회마저도 잃어버렸다.

그나마 이들의 행동이 옳다고 편을 들어주었던 선배들은, 언젠가부터 자신들과 함께 ‘보수 세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냉소적인 시선을 보냈던 대중 정치인들 밑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자신들에게 그동안 호통을 쳤을 선배들의 ‘변절’은 그들에게는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을지 모른다).

90년대 후반부터 IMF 사태 이후 한국 사회가 새로운 변화들을 요구하기 시작하고, 전 세계적으로 공산 진영 붕괴 이후 ‘역사의 종말’ 형태라고 선전됐던 자유주의·자본주의 사회가 ‘신자유주의’ 등으로 인한 각종 폐단에 고민하는 현실을 확인하면서, 진보 세력들은 자신들이 보유한 ‘80년대 가치’의 유효성에 희망을 가지고, 같은 형태의 가치들을 구현한다고 판단되는 다른 지역의 진보 성향 운동들을 부각하기 시작했다. 한때 진보 성향 인사·언론들을 통해 중점적으로 소개됐던 중남미의 진보 성향 운동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석유 부국'이었던 베네수엘라는 2014년 유가 폭락과 경제 정책 실패로 국가 파산 위기까지 몰리면서 현재 전 국민의 90%가 빈곤 상태(출처 MBC)
'석유 부국'이었던 베네수엘라는 2014년 유가 폭락과 경제 정책 실패로 국가 파산 위기까지 몰리면서 현재 전 국민의 90%가 빈곤 상태(출처 MBC)

그러나 이들 역시 시간이 지나 그 나름의 한계·허상들이 밝혀지면서, 진보 세력들은 또다시 실망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 진보 세력들은 서구 복지국가로의 전환으로 자신들의 견해의 폭을 서서히 좁혀나가기 시작한다.

사실 자본주의 경제가 여전히 작동하고 그 시작에 보수 세력 역시 관여한 바 있는 서구 복지국가는, 한국 진보 세력들이 과거에 배우고 추진해나가고자 했던 ‘학생-사회 운동’의 거창한 이상향들과는 거리가 존재했다.

하지만 과거 그들이 인식하는 ‘80년대 가치’와 비슷하다고 판단했던 여러 사회상의 문제점들이 확인되면서, 이제 남은 것은 여전히 견고한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조금이나마 변화를 도모해 볼 수 있는 서구 복지국가 정도밖에 없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이러한 모습은 ‘후퇴’에 가까웠겠지만, 생존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만큼 진보 세력의 사회적 영향력이 계속 낮은 현실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를 언제까지 외면하기는 어려웠다.

서구 복지국가 논의는 진보 세력의 부활을 어느 정도 안겨주는 듯 보였다. 우선 이들과 교류하며 그 견해들을 일정 부분 포용해 나갔던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등장으로, ‘80년대 가치’가 조금씩 한국 사회 안에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또한 2000년대 이후 경제 문제들을 통해 ‘신자유주의’의 부작용을 최소화할 사회적 안전장치에 대한 필요성을 한국 사회 내부 구성원들이 인식하게 되면서, 서구 복지국가 방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이에 따라 진보 세력은 그 구체적인 생각에는 차이가 있을지 모르나, 적어도 새로운 대안을 제시해보려는 인사들이라는 호평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나아가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창출한 민주당계 세력의 지지자들에게도 미래를 위해 협력·지지할 수 있는 대상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이렇게 진보 세력의 영향력 강화가 진행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던 상황 속에서, 진보 세력은 커다란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바로 ‘박근혜 정권’의 등장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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