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이즈음 진보 세력을 주도하게 된 ‘포스트 80년대 운동권 세력’이 지금까지와는 반대되는 구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싶어 했다는 점이다.?이들에게 있어서 같은 세대 문화계 인사들의 처지는, 곧 박근혜 정권 및 보수 세력과의 대립에 대한 보호의 대가로 자신들의 문화관을 구현하는 도구의 역할을 요구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으로 비쳤다.
이때 ‘포스트 80년대 운동권 세력’들이 보유한 지적 우위는, 문화계가 주로 의식하는 서구 등의 권위를 등에 업고 그들을 자신들의 사고 구조 속으로 유도하는 좋은 수단으로 활용됐다.
이들과의 관계 형성을 통해 상승된 정신적인 위상을 확보하게 됐다고 판단한 문화계 인사들 중 일부는 이제 스스로를 새로운 사회 변화를 선도할 ‘엘리트’로 인식하고, 그동안 지지·지원해주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신들의 취향을 강조하며 변덕을 부리기도 했던 대중들에 대한 우월의식을 갖게 된 것이었다.
수용 양식의 원형인 서구 등의 영향으로 진보적인 사고방식을 접하는 데에 익숙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진지한 사회 고찰 및 변혁보다는 현실 속의 갖가지 욕구들에 최대한 충실하곤 하는 속물적인 문화계에게, 페미니즘은 ‘포스트 80년대 운동권 세력’이 지적·사회적 허영심을 미끼로 그들을 자신들의 관리하에 둘 수 있게 만들 훌륭한 도구였다.
여기에는 그동안 포스트 80년대 문화계들의 문화 행위들을 소비하는 데에 여성들의 적극성이 두드러졌던 경우가 상당했으며, 나아가 그 영향으로 이후 해당 행위들에 종사하려는 여성들의 비중도 상승했다는 점을 활용하겠다는 의도도 포함돼 있었다.
문화계가 자신들이 공략하려는 여성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만큼, 이들을 매개로 자신들의 영향력을 전 방위적으로 강화하겠다는 게 ‘포스트 80년대 운동권 세력’의 구상이었다.
이때 ‘메갈리아’는 그동안 ‘포스트 80년대 문화계’의 발전 동력이기도 했던 문화 소비자와의 소통과 그들에 대한 대변을 오히려 역이용해 문화계 안으로 침투해 과잉대표한 후 ‘여성의 주체성’을 명분으로 선동 및 검열함으로써, 문화계가 최종적으로 ‘포스트 80년대 운동권 세력’과 연합한 ‘페미피아’에게 간접적으로 복속돼 ‘정치의 시녀’이자 ‘나팔수’가 되게끔 조련하는 역할을 맡은 것이었다.
이제 (팬클럽이나 동인 활동 같은) 여성으로 구성된 문화 행위 집단은 단순한 문화 소비가 목적이 아닌, ‘포스트 80년대 운동권 세력’의 그 같은 구상에 따라 사회를 전반적으로 바꿀 유력한 ‘홍위병’ 양성소로 활용될 터였다.
클로저스 성우 교체 사건으로 확산된 문화계 및 정치·언론·학술·교육·노동계 등 엘리트·전문가 집단의 ‘메갈리아’ 지지는, 문화계의 ‘포스트 80년대 운동권 세력’에 대한 정신적 의존성이 얼마나 심화했는지를 알려주는 동시에, 이를 파악한 후자가 전자를 매개로 사회 전반에 자신들의 영향력 확대를 시도하는 ‘문화대혁명’ 추진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메갈리아’와의 소통과 ‘포스트 80년대 운동권 세력’과의 관계 형성을 통해 지속해서 주입된 지적·사회적 허영심은, 문화계로 하여금 두 집단에서 통용되는 ‘페미니즘’ 수용을 통해 자신들이 새로운 사회적 흐름에 동참하는 동시에 이를 주도하는 듯한 착각과 더불어 ‘엘리트의식’을 불러일으키게끔 했다.
그리고 그러한 문화계의 의식은 ‘메갈리아’의 실상을 파악하고 문제점을 지적하는 문화 소비자들을 오히려 ‘우매한 대중’으로 규정하거나, 그들의 항의와 압박을 그토록 자신들이 민감하게 여기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탄압으로 이해하며 그들 자체를 ‘보수 세력’ 혹은 ‘기득권 세력’에 등치시키는 모습을 만들어나갔다.
여기에 ‘포스트 80년대 운동권 세력’과 ‘페미피아’ 연합은 자신들이 보유한 사회적 지위와 지적 우위를 동원해 문화계의 이런 태도에 힘을 실어주고 미화시키면서, ‘표현의 자유’에 대한 보호를 명분으로 문화계 내부에 자신들의 발언권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메갈리아’에 대한 모든 비판적인 목소리를 ‘일베’로 규정한 두 집단의 태도는, ‘일베’의 부정적 이미지를 상기시켜 문화계에게 반대 구성원들에 대한 우월의식과 경계심 및 적대감을 심화시키는 동시에 그들이 자신들의 현실 인식과 문화관이 설정한 울타리에서 함부로 벗어나지 못하게끔 만들려는 목적도 포함됐다.
드디어 ‘포스트 80년대 운동권 세력’과 ‘페미피아’ 연합은 자신들의 주문에 따라 문화계의 문화 행위를 맞추어 줄 것으로 서서히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메갈리아’의 압박을 곧 ‘시대의 요구’로 해석·선전하고 그에 대한 반영을 요구하면서, 여기에 자신들의 문화관이 구현되기를 함께 주문했다.
‘메갈리아’와 두 집단 연합은 겉으로는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서로 장단을 맞추어가며 문화계에 간섭해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여성혐오’는 해당 집단들이 문화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만능 논리였다.
포스트 80년대 문화계는 자신이 중시하는 ‘표현의 자유’를 보존하기 위해 진보 세력을 찾아갔지만, 오히려 그들의 ‘정치적 시녀’가 되는 수순을 밟아나가고 있었다.
박근혜 정권의 실패 및 부작용 부각과 그에 따른 저항은 이미 진행된 문화계에 대한 ‘포스트 80년대 운동권 세력’의 영향력 행사를 더욱 심화시켰다. ‘포스트 80년대 운동권 세력’은 그동안의 정치 현상들을 근거로 ‘박근혜 정권’을 ‘군부독재정권’의 후신으로 규정하고, 그에 대항하는 자신들을 선배들과의 연관성 및 ‘80년대 가치’ 계승을 내세워 과거 ‘민주화 세력’의 후신이라고 자처했다.
이런 구도 설정은 한국 사회 주도권의 정당성이 앞으로는 박근혜 정권이 아닌 그 대항 세력으로 넘어가리라는 이미지를 구축했으며, 거기에 따라 문화계는 박근혜 정권 대항 세력에 최대한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적어도 대중에 대한 자신의 긍정적 이미지를 유지하는 데에 도움을 주리라고 판단을 하게 됐다(꼭 그 같은 이유가 아니더라도 박근혜 정권 기간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의식해왔던 보수 세력에 대한 부정적 정서가 문화계의 정권 반대 운동 참여를 이끌어내기 쉬웠다).
그런데 정권 대항 세력을 주도한 ‘포스트 80년대 운동권 세력’은 이런 목적에서 나온 문화계의 접근을 곧 그들에 대한 자신들의 영향력 행사 강화의 기회로 활용했다. 중식이 밴드와 DJ DOC의 노래 가사, 그림 ‘더러운 잠’에 대한 ‘여성 혐오’ 규정은 바로 그 같은 ‘포스트 80년대 운동권 세력’의 ‘문화계 길들이기’의 일환으로 진행됐다.
대중의 호응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문화계 인사들이, 현재 대중의 지지·지원을 받는 사회적 흐름을 주도하기에 이에 대한 반대 행위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부여할 수도 있는 자들의 ‘검열’을 무턱대고 거부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포스트 80년대 운동권 세력’들 안에서나 통용되던 ‘자아비판’은 이제 ‘여성혐오 인정’과 ‘페미니즘 공부’라는 표현으로 바뀌고 확산돼, 문화계 등 외부 구성원들을 ‘검열’하는 데에 남발되고 있었던 것이다(우스운 사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박근혜 정권에 대한 맹목적 지지와 옹호·동정을 보여줬던 ‘메갈리아’와 일부 ‘페미피아’들에 대해서는, 그 같은 ‘검열’을 하지 않고 슬그머니 넘어갔다는 점이었다).
문화계를 통한 ‘포스트 80년대 운동권 세력’의 문화 ‘검열’은, 이들이 박근혜 정권 탄핵 운동을 통해 일반 대중들을 이끌며 사회 변화의 주도자 역할을 수행했다고 믿으면서 보다 심화됐다.
이들은 탄핵 이후 자신들이 관여하는 진보 세력의 사회적 영향력이 운동 당시에 느꼈던 그것과 상당히 괴리됐음을 의식하고, 그 원인을 일반 대중들의 여전한 기존 현실 사회 인식의 안주 문제로 돌렸다(‘권력 결핍’에 따른 ‘집착’이 심한 이들로서는 당연한 결론이었다).
이런 판단에서 ‘페미니즘’은 현재 ‘남성 주도 사회 구조’에 복무하고 있는 스스로의 ‘반동성’과 ‘계급성’을 지속적으로 의식하게 함으로써, 외부 구성원들이 장기적으로 자신들의 사회 변혁 주도권에 종속되게끔 만들 유용한 사상적 도구였다.
이때 문화계는 박근혜 정권 기간부터 이루어진 ‘검열’에 들어맞는 문화 행위들을 내놓으며 일반 대중들을 ‘교도’하는 역할을 맡은 것이었다.?여기에 ‘메갈리아’는 ‘포스트 80년대 운동권 세력’과 ‘페미피아’들의 사회적 지위·지적 우위를 활용한 옹호 속에, ‘불편함’을 무기로 문화계와 일반 대중들을 단속할 든든한 ‘홍위병’ 역할을 충실히 이행할 터였다.
이제 ‘포스트 80년대 운동권 세력’과 ‘페미피아’, 그리고 ‘메갈리아’의 ‘교시’에 따르지 않는 다른 문화 행위들은 그들에게 있어 ‘남성 주도 사회’를 꿈꾸는 ‘반동’ 행위에 다름 아니었다. ‘포스트 80년대 운동권 세력’들은 그토록 군부독재세력의 ‘빨갱이’ 규정과 각종 문화 검열들을 ‘자유 탄압’의 사례로 들며 대대적으로 비판했지만, 정작 자신들은 지금 그에 못지않은 행위들에 심취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문화’라는 것은 단순히 현실 사회와의 관계에 충실하기보다는, 이를 초월하며 구성원들 스스로를 만족시켜주는 측면도 내재한다. 이러한 ‘문화’의 본질을 감안했을 때, ‘포스트 80년대 운동권 세력’과 ‘페미피아’들이 주도하는 문화 ‘검열’은 사회 구성원들에게 스스로를 가두고 옥죄는 ‘억압’ 그 자체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문화’의 본질을 누구보다도 직접 체현하는 위치에 있으면서 적절한 시대 환경과 만나 ‘표현의 자유’를 만끽해 온 문화계 인사들에게도 강하게 다가올 부분이었다. 메갈리아·페미피아와 그에 동조하는 문화계 인사들, 그리고 진보 성향 엘리트·지식인들이 연합해 배우 유아인과 온라인·오프라인상에서 벌인 설전과, 유아인에게 열광하는 온라인 공간에서의 반응은 앞에서 언급한 ‘검열’ 현상이 가진 폭력의 심각성 및 퇴행성과 이에 대한 일반 대중들 및 문화계의 피로감이 얼마나 누적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더하여 ‘문화’가 취하곤 하는 ‘형태의 모호함’은 구성원들이 사회와의 관계를 통해 형성했던 나름의 기준들을 교묘하게 넘어설 수 있기에 무엇보다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지만(이를 가장 잘 활용했던 존재가 ‘정치적 올바름’이 심화되기 이전의 미국 할리우드 영화들이었다), ‘포스트 80년대 운동권 세력’과 ‘페미피아’들은 그보다는 ‘검열’과 ‘교시’을 통해 주입된 내용을 노골적으로 표출하는 문화를 추구하면서 질 좋은 문화 행위 자체의 소비를 통해 스스로의 만족감을 얻고자 하는 다른 구성원들의 거부감만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두 집단은 이같은 ‘문화대혁명’의 부작용에 문제의식을 갖기 보다는, 그에 대한 외부 구성원들의 이탈을 막는 모습에 더욱 치중했다.
최근 발생하고 있는 ‘미투’ 혹은 ‘무고’ 광풍은 두 집단이 자신들의 ‘문화대혁명’이 계속 진행되어야 할 의미 있는 행위임을 사회 구성원들에게 선전하는 동시에, ‘여성의 비극성’을 정서적·감각적으로 부각하는 방식으로 스스로의 ‘반동성’과 ‘계급성’을 의식하게끔 요구함으로써, 그들을 자신들의 문화 주도 및 ‘검열’권에 여전히 종속시키려는 목적으로 오·남용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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