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 페미니즘 광풍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각
- 주체성 부르짖는 비주체적인 ‘상실의 세대’
- 박근혜 정권의 판 뒤집기와 ‘상실의 세대’의 위기의식
- ‘상실의 세대’와 ‘페미피아’, 영혼의 단짝으로 만나다 1
- ‘상실의 세대’와 ‘페미피아’, 영혼의 단짝으로 만나다 2
- 홍위병 이끄는 ‘강청’이 되고픈 ‘상실의 세대’ 1
- 홍위병 이끄는 ‘강청’이 되고픈 ‘상실의 세대’ 2
- ‘상실의 세대’, ‘승리의 세대’를 검열하다 1
- ‘상실의 세대’, ‘승리의 세대’를 검열하다 2
- 모택동 자임하는 ‘유신·386세대 운동권 세력’
- ‘80년대 가치’ 맹종 아닌 필터링과 극복 요구하며 1
- ‘80년대 가치’ 맹종 아닌 필터링과 극복 요구하며 2
필자는 향후 진보 세력의 역사를 다루는 데에 있어서 ‘박근혜 정권’의 등장을 중요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본다. 이는 단순하게 그 부친이었던 박정희 정권과 닮은 모습이 종종 보일 만큼 정치 행위가 후진적이어서가 아니다.
물론 박근혜 정권 안에서 그러한 형태들이 상당 부분 나타났던 것이 사실이나, 여기에 못지않게 정권 창출 및 유지 과정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기민한 모습을 드러냈고 그 내용 또한 진보 세력에게 타격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는 점 때문이다.
박근혜 정권 창출 과정은 그동안 보수 세력이 종종 보여줬던 ‘정치적 유연성(정권만 창출·유지할 수 있다면 자신들과 다른 요소들은 얼마든지 흡수 가능하다는 태도)’의 절정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집권 과정에서 당시 한국 사회의 주요 과제로 부각됐던 ‘경제민주화’를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다는 사실이다. 이때까지 보수 세력은 서구 복지국가 방식의 도입 시도들을 ‘예산 퍼주기’·‘포퓰리즘’ 등으로 규정하며, 이들 안에서 부정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들을 낙인찍기에 바빴다.
그런데 박근혜 세력은 과거 ‘경제민주화’의 대부로 알려졌던 김종인을 영입하는 등 이전 보수 세력과는 다르다는 이미지를 구축해 나가기 시작했다.
나아가 박근혜 세력은 오늘날 한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의료·건강보험이 부친인 박정희의 업적임을 강조하는 등, 오히려 자신들이야말로 ‘경제민주화’의 적임자라고 선전하기에 이른다. 박근혜 세력의 이러한 모습은 여론을 흔들리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동안 서구 복지국가 방식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 온 거대 보수 정당이 이제는 그 방식의 도입을 검토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더군다나 그 정당의 대표는 내외 모든 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박근혜였다.
일반 대중들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세력 확장에 한계를 가지고 있고 그들만의 이론을 고지식하게 고수하고 강요하려 드는 인상을 지닌 진보 세력보다, 그 세력도 크고 종종 유연한 태도를 보여주곤 하는 보수 세력과 손을 잡는 편이 낫다는 판단을 하기 쉬워졌다.
더군다나 진보 세력들보다 여러 전제 조건들을 달아놓은 박근혜 정권의 ‘경제민주화’ 공약들은 오히려 일반 대중들에게는 점진적·현실적인 이미지로 비추어져, 서구 복지국가로의 전환이 한국 사회에서도 성공적으로 적용될지에 대한 불안감을 일정 부분 잠재우며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해 박근혜 세력은 이준석·손수조 등 2·30대 인물들을 지지자로 끌어들이고, 이들을 정계에 출마시키려는 시도함으로써 청년층을 포섭하고자 했다. 민주당계·진보 세력의 압도적인 지지층으로 인식됐던 청년층을 거의 포기하는 자세였던 이전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공략하겠다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박근혜 세력은 실질적으로는 제대로 된 도움을 주지도 못하면서 자신들의 이상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해 피로감만을 안겨주는 민주당계·진보 세력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는 청년층이 존재함을 부각시키고, 자신들은 그들과는 구별되게
2·30대 인사들의 적극적인 기용을 통해 이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반영하려고 노력한다.
는 이미지를 구축했다.
박근혜 세력의 이러한 시도는 보수 세력의 기존 이미지를 완전하게 극복하지는 못했으며(여기에는 박근혜 자신이 갖고 있던 기존 이미지와 함께 이전 정권인 이명박 정권의 여러 문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결과도 성공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그들의 집권 과정에서 보여준 모습들은 과거 민주당계 정권 및 진보 진영의 한계도 목격한 바 있는 청년층들을 일정 부분 동요하도록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게다가 박근혜 세력의 청년층 인사 기용은 이전 보수 세력과도, 나아가 민주당계·진보 세력과도 비교하면 적어도 형식상에서는 파격적이었기에(당장 민주당계·진보 진영 안에서 그 이름과 이미지를 일반 대중들이 제대로 기억해주는 청년층 정치인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 나아가 그토록 압도적인 차이가 나는 청년층의 지지 분포와 비교해 보았을 때 그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보시라),
보수 세력이 이전과는 달라졌으며 더하여 이들을 통해 새로운 변화를 도모해 볼 수도 있지 않겠느냐.
는 인식을 주변으로 확장해 나아가는 데에는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고 하겠다.
그뿐만 아니라 박근혜 세력은 ‘여성’이라는 자신의 성별도 이미지 구축의 용도로 활용했다.
사실 박근혜의 정치적 성공은 자신의 부친인 박정희에 대한 향수 이외에도, 그를 활용해 여러 차례 보수 세력의 구원자 혹은 견제자의 역할을 자임하며 자기 헌신의 이미지를 일반 대중에게 각인시킨 전략이 컸다.
그런데 대통령에 출마할 때에는 어느 때보다도 자신이 ‘여성’임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성의 정치 참여 양상을 선진적인 정치 발전의 척도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한 현실에서,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라는 타이틀은 보수 세력이 오히려 사회 발전을 이끄는 존재임을 일반 대중에게 심어주고, 더불어 그 지지자들에게는 여기에 참여하고 있다는 명예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처럼 박근혜 세력은 이전과는 다른 보수 세력의 이미지 구축을 통해 중간층 유권자들의 마음을 서서히 움직이며, 결국 ‘30%의 열성 박정희·보수 추종자들만의 공주님’으로 머물지 않고 과반 이상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박근혜 세력의 승리는 진보 세력에게 있어 이전과는 다른 허탈감과 위기의식을 안겨줄 수밖에 없는 사안이었다.
우선 진보 세력에게 있어서 ‘서구 복지국가로의 전환’은 오랜 시행착오 끝에 어느 정도 정착해 차근차근 구체화하였던 목표이자, 이상향 추구와 현실과의 타협을 각각 일정 부분 충족해 자신의 존재감을 내세울 수 있는 ‘최후의 보루’였다.
실제로 이전까지 보수 세력의 태도는 진보 세력들이 그 ‘최후의 보루’를 기반으로 새로운 변화를 주도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이러한 서구 복지국가 논의를 박근혜 세력은 단기간에 습득해 자신의 정권 장악을 위한 도구로 활용했다.
이제 세부적인 정책 내용을 일일이 검토하기 어려운 일반 대중들의 입장에서 박근혜 세력과 진보 세력의 서구 복지국가 방식 도입 논의는, 어차피 방향성이 같다는 판단하에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문제에 불과했다.
진보 세력은 그토록 견고하리라 믿었던 ‘최후의 보루’에서 반격은커녕 도리어 이를 내주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박근혜 세력의 청년층 공략도 진보 세력에게는 실패라고 평가 절하할 수 없는, 오히려 위협으로 느낄만한 사안으로 다가왔다. 그동안의 견고한 청년층의 지지와 호의는 진보 세력에게 있어서 세대교체에 따른 세력 확장이 점진적으로 일어나리라는 예측 속에, 자신들의 어려운 현실 극복과 이상향 구현을 희망할 수 있는 버팀목이었다.
이같은 인식에 따라서 박근혜 세력의 청년층 포섭 시도는 진보 세력에게 “너희들의 미래마저도 빼앗아 가겠다”는 행위로 읽힐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이명박 정권 시기 즈음부터 청년층의 참여가 적극적인 온라인 공간 안에서 보수 세력의 시각이 반영된 목소리들이 두드러지기 시작하고, 나아가 ‘일베’로 대표되는 진보 세력에 대한 적대적이고 과격한 태도를 노골적으로 표출하는 움직임까지 등장하면서, 진보 세력은 미래에 관한 자신들의 우려가 현실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을 하기 쉬웠다.
이밖에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라는 타이틀을 내준 것도 진보 세력에게 일정 부분 허탈감을 안겨줄 만한 사안이었다. 그동안 진보 세력은 (실제 그러한지에 대한 사실 여부를 떠나) 자신들의 활동 안에서 ‘여성’이라는 존재가 상당한 역할을 했고, 이에 따라 그들을 중요하게 다뤘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그토록 기여해왔다고 믿었던 ‘여성’운동의 상징적인 성과로 기억될 ‘여성 대통령’의 첫 등장이, 자신들이 가장 거부감을 느끼는 존재이며 ‘여성’운동과 관련해 제대로 된 역할을 해왔다고 보기 어렵다고 인식했던 박근혜에 의해 이루어지게 됐다.
이제 진보 세력은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라는 상징성으로 인해 마치 새로운 변화를 선도한 것 같은 박근혜 세력에 비해, 오히려 말만 앞세울 뿐 이를 제대로 하지 못하며 도리어 방해하는 듯한 이미지로 일반 대중에게 각인되지 않을지도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진보 세력은 그들 스스로가 굳건하게 주도·점유하고 있다고 믿었던 사회 담론·지지층·이미지 등을 박근혜 정권의 성공 여부에 따라 완전히 내줄 수도 있는 상황에 봉착했다. 이미 9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진보 세력은 허탈감과 위기의식을 가진 바 있으나, 이는 주로 주변 환경 변화와 자신들의 이상향이 상호 괴리됐던 데에서 기인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주변 환경의 요구와 자신들이 설정한 목표가 어느 정도 맞아 들어갔다고 믿은 상태에서 패배한 것이다. 그토록 싫어했던 대결 상대는 오히려 자신들이 그동안 관심을 기울였던 것들을 이전부터의 소유물인 양 활용해 승리를 거두었다.
선도자가 반대로 후진적이라고 인식될 수 있다는 이런 현실에 진보 세력은 상당한 혼란과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박근혜 정권 형성이 진보 세력에게 준 타격을 가장 크고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이들이 다름 아닌 ‘포스트 80년대 운동권 세력’이었다는 점이다. 오랜 기간 ‘포스트 80년대 운동권 세력’들은 유신·386 세대 선배들을 뒷받침하는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대학 시절에도 사회로 나가 본격적인 진보 성향 활동을 할 때에도 ‘80년대 가치’를 계승하겠다고 나선 이상 이들이 그 선구자인 유신·386 세대 선배들에게서 벗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시간’은 ‘포스트 80년대’ 세대에게도 공평한 듯 보였다. 유신·386 세대가 연령상 중진급·상층 인사를 전담하는 위치에 놓이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포스트 80년대’ 세대가 진보 세력의 실무 책임을 맡으며 활동을 주도하는 자리에 올라서게 된 것이다.
이들이 유신·386 세대를 보좌해나가며 직위에 올라가기까지, 진보 세력은 어느 정도 긍정적인 이미지와 체계적인 조직, 선도적인 사회 담론을 구축한 듯 보였다. 그리고 이들은 마침내 그 같은 진보 세력의 기반 위에서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주체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박근혜 정권의 등장으로 ‘포스트 80년대 운동권 세력’의 이러한 기대는 무참하게 짓밟혔다. 그들이 탄탄한 상태로 물려받았다고 믿었던 진보 세력의 기반은 생각보다 허상에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빼앗길 수도 있다는 우려도 확인됐다.
이미 90년대를 전후해 커다란 ‘상실’을 경험했던 세대가 또 다른 커다란 ‘상실’과 마주한 셈이다. 더욱이 이번 ‘상실’은 진보 세력의 존재감조차 완전하게 잃어버리도록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하고 충격적이었다.
이제 ‘포스트 80년대 운동권 세력’은 자신들이 꿈꾸었던 ‘주체적인 진보 세력 운영 및 강화’가 아닌 ‘진보 세력의 재정립’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 봉착했다.
문제는 이들이 학생 운동 시절부터 뇌리에 깊숙하게 박혀 오랫동안 완고하게 유지해왔던 ‘80년대 가치’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신들의 존재를 만들어나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그 같은 작업은 자신들의 존재감과 그동안의 노력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행위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며, 설령 원하더라도 이를 달성할만한 능력도 기력도 시간도 부족했다.
그렇다면 결국 자신들에게 익숙한 ‘80년대 가치’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야 할 텐데, 해당 가치가 만들어진 지 한 세대가 지나가는 현실에서 사회 전반에 호응을 얻을만한 것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스트 80년대 운동권 세력’들은 그 안에서 자신들이 주도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되는 하나의 사회 담론에 주목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바로 ‘페미니즘’이었다.
계속
저작권자 ⓒ 리얼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