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글 쓰는 서연입니다.
이번 주에는 아주 반가운 전화가 걸려왔는데요. 대학교 때 같은 방을 썼던 동창이었습니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얼굴과 서서히 익숙해져 오는 목소리 뒤로 그때 그 시절의 장면들이 희미하게 따라 올랐습니다.
아예 연락이 끊길 만큼 크게 소원해져 있었는데 우연히 한 매체에 실린 정보와 이름으로 어렵게 저를 찾았다고 했습니다. 요즘은 SNS의 활동으로 잊었던 인연을 다시 찾는 일이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처럼 그 가까운 물리적 거리를 멀리 돌아가야 하는 유일한 길만이 허락되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또 물리적 방법보단 감정적 화해가 더 어려울 수도 있음을 알기에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우리 모두의 관계는 한 다리 건너 한 다리이며 세상 모든 이들은 아직 만난 적 없는 친구라는 말도 새삼 다시 생각났고요.십 년이 넘는 시간임에도 그 친구가 했던 한 마디는 어제 들은 말처럼 선명하게 남아있습니다.
서연이는 유리구슬 같아. 깨질까 아주 조심조심, 소중하게 대해줘야 할 것 같아.
그때는 잘못을 지적받은 것처럼,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을 들켜버린 것처럼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었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여전히 제게 좋은 사람으로 남은 이유는 그것이 공격을 위한 말이 아니라 관계를 위한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은 네덜란드 작가 톤 텔레헨의 <고슴도치의 소원>이라는 우화로 관계에 대해 조명해보려 합니다. 고슴도치는 날카롭고 뾰족한 가시를 몸에 지닌 동물인데요. 그에게 있어 그 가시는 사랑과 증오의 대상입니다.
찔리면 아프고 멀리하면 얼고 마는 딜레마. 이렇게 자기 자신과의 화해도 어려운 그는 다른 동물들과의 관계에서도 골머리를 앓습니다.
어느 날 그는 친구들을 초대하려고 편지를 쓰는데요, 갑자기 걱정돼요. ‘정말 올까?’ 하는 의심에서부터 ‘어떤 케이크를 만들지?’와 같은 결심의 문제, ‘그냥 오지 말라고 할까?’ 하는 망설임, ‘이럴 땐 이렇게 해야 했어’와 같은 후회, ‘모두가 내 가시를 무서워하잖아’ 하는 자괴감, ‘그러나 나는 내 가시가 좋아’와 같은 자기 긍정, ‘꼭 올 친구들만 부를까?’와 같은 불확신, ‘친구들이 나만 따돌리고 말 거야’ 하는 우울함까지 반복되고 번복되는 감정들에 휘둘려 아무 선택도 하지 못하고 같은 생각만 맴돌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기만의 방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한 선택입니다. 가만히 거울 속의 나를 들여다보며 위로하기도 하고요. 이 거울 속의 내가 진짜 나인지, 나는 정말 어떤 동물인지 고민하기도 하고요.
나 자신··· 경멸스러웠다. (중략) 나 자신··· 그게 뭘까?
그러다 동물 친구들이 모두 한 번씩 자신의 집에 방문하는 꿈을 꾸고 상상을 하게 되는데요. 그럴 때마다 문제가 생겨요. 자신의 집까지 방문해준 친구들에게 잘해주고 싶은 마음 반, 친구들만의 방식에 자신을 잃어가는 것이 싫은 마음 반 사이에서 역시 혼자 있는 것이 가장 좋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혼자 있다 보면 외로워져요. 불안해지고요. 또 의심이 짙어가죠. 내가 혼자 있고 싶어 혼자 있는 것이었는데 누구도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느끼고, 그것이 가시 때문이라고 확신하게 되고, 따돌림을 당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점점 망상이 커지는 거죠.
그런데 이 모습, 참 닮아있지 않나요? 유리구슬 같았던 십수 년 전의 제 자신과는 분명하고 어쩌면 여러분 모두와도요. 고슴도치와 같은 이 마음, 참 이상한 마음인데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도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이 되고 싶지만, 누구와 어떻게든 연결되고 싶거든요. 나로서 인정받고 독보적 영역에서 보란 듯이 무엇이든 해내고 싶지만, 관계 안에서 사랑받고 싶기도 하거든요.
자아실현이라는 말은 그래서 참 아이러니한 말인 것 같다고 늘 생각해왔습니다. 이 모든 게 공포, 두려움, 불안과 같은 감정이 우리 삶의 기저엔 깔렸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심리학, 종교학책을 통해 나름대로 터득한 진실은 태아가 엄마의 몸에서 떨어져 나올 때 느꼈던 첫 감정인 공포가 타인과의 연결을 원하는 욕구로, 삶의 매 단계에서 성장하고 큰 존재가 되고 싶은 욕구는 나를 초월하고 타인과의 합일을 지향하고 깨닫는 결말로 승화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고슴도치의 이런 아이러니한 상태가 모든 존재의 마음의 기본바탕이자 삶의 면면들이라 이해하게 돼습니다.
나는 이상해, 겁을 주고 외롭고 자신감도 없어. 내겐 가시만 있어. 그리고 누군가 나를 찾아와 주길 원하면서도 또 누군가 오는 걸 원하지 않아···
고슴도치는 자신이 사라지면 어떨까 하고 극단적인 생각마저 하게 돼요. 어쩌면 오래전 멸종된 다른 동물들처럼 자신의 존재 역시 누군가에겐 없는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말이죠. 그래서 그가 내린 결론은 아래의 두 단락과 같습니다.
그는 많은 우여곡절 끝에 친구들을 초대하려고 썼던 편지를 찢어버려요. 처음 초대하려고 썼던 편지는 결국 아무도 오지 않길 바란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함이었을 뿐이라고 말이죠. 그에게 다른 동물들이 아니라 괴물이 찾아왔을 때, 그는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괴물이 아닌, 다른 친구들이 오면 좋겠다고 줄곧 생각해왔다는 사실을.
유일하게 마음이 편했던, 상상 속의 다람쥐와의 만남이 끝날 때쯤, 겨울 한파의 폭풍 속에서 그는 마침내 자신과 화해하게 됩니다. 자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몸에 박힌 가시만이 폭풍을 막아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굳이 초대와 방문이 아니더라도 동물들은 모두 자신의 친구라는 사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굳이 만날 필요가 없다는 사실, 특히 다람쥐와는 조만간 또 만날 수 있다는 사실도 함께 깨달아요.
그들 모두 고슴도치의 친구였다. (중략) 서로를 초대할 필요도, 찾아갈 필요도 없었다. (중략) 다람쥐의 편지만 달랐다. (중략) 조만간 또 만나자! 고슴도치가 알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말이었다.
고슴도치에게 가시가 애증의 대상이듯, 우리에게 마음의 갖가지 감정도, 나와는 다른 타인들의 존재도 애증의 대상일 겁니다. 나와는 아직 화해되지 못한 내 자신이 밉기도, 애틋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그런 나를 사랑해줄 사람들이 필요하기도 하고 어디까지나 타인에 불과할 그들이 필요 없기도 하고요.
고슴도치가 내린 결론은 지금 당장 필요 없는 것들에 대한 불안을 떨쳐버리는 것, 필요는 없지만 지금 내게 들러붙어 있는 것들에 대한 관심은 소중하게 지켜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삶에 완벽이란 것은 없거든요.
많이 그리워했던 친구들이지만 막상 자신을 방해할 수도 있고, 없애버리고 싶은 가시지만 정작 자신의 자부심이기도 한 것처럼요. 서툴게 모났던 그때의 나를 멀리서 찾아주는 친구가 있어서, 아직도 모자란 지금의 나를 어쩔 수 없이 사랑하는 내가 있어서 오늘도 삶을 소원할 수 있는 ‘서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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