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현상이 구조적 차별 때문이라고 주장하려면,
1. 어떠한 구조가 있는데
2. 이것이 어떤 방식으로 차별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3. 그 결과로 이런 현상이 생겼다
는 방식으로 실천적으로 교정되어야 할 구조의 실체를 특정하고, 이에 따른 인과관계를 제시해 입증해야 한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우대조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 개념을 읊조리는 이들은 구조의 실체를 제시하지 못하고, 어떤 방식으로 차별을 만들어내는지도 말하지 않은 채, 그저 사회현상의 한 면을 포착해 나열하면서 이것이 구조적 차별의 결과라고만 한다.
오늘날 페미 진영이 반복적으로 말하는 ‘구조적 성차별이 존재한다’라는 주장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 주장은 어떤 의도를 품고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오늘날 우리 사회에 제기되는 “여성에 대한 구조적 차별이 존재한다”는 주장에서 ‘구조’라는 개념은 실체가 없는 텅 빈 개념이다. 이 주장은 결국 ‘결과 지표에서 성별 차이가 존재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뿐이며, 그러므로 ‘할당제를 비롯해 여성을 적극 우대하는 조치를 실시하라’는 요구를 정당화하려는 의도를 품고 있다. 즉 결과의 차이 자체를 이유로 남성에게는 불리하게, 여성에게는 유리하게 국가가 법제도적 차별을 가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사적 주장에 불과하다.
어떤 주장은 논의의 맥락을 살펴볼 때 그 본질이 드러난다. ‘여성에 대한 구조적 차별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남성에게는 불리하고 여성에게는 유리하도록 법적 차별을 해야만 시정되는 정책이 정당한가 아니면 부당한가라는 문제와 붙어 있다.
우리 사회에서 위의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여성에게만 공공주택 입주권리를 준다거나, 여성만이 지원할 수 있는 법학전문대학원·약학전문대학원을 인정하거나, 창작자와 창작물에 여성이 들어가기만 하면 국가기관이 공모전에서 가산점을 준다거나, 승진과 공무원 임용에서 할당제와 가산점제를 실시하거나, 형사절차에서 남성에게는 무죄추정원칙·반대신문권·무고에 대해 적시의 수사를 통해 보호받을 권리를 훼손한다거나 하는 정책들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겹친다.
그러므로 ‘구조적 차별’에서 ‘구조’는 부정의의 개념과 결합될 수밖에 없다.
부정의와 불의에는 개인적인 것과 구조적인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신이 싫어하는 누군가의 재산을 강제로 뺏는다면 그 사람은 개인적인 불의를 행한 것이다. 그는 처벌될 것이며 피해자는 절차에 따라 구제된다. 여기서 교정되어야 할 것은 그 사람의 행위이며, 구제되어야 할 것은 피해이다.
그런데 어떤 인종에 속한 사람은 다른 인종 사람의 재산을 일정한 경우 마음대로 빼앗을 수 있고, 이것이 합법이라고 한다면 이는 구조적인 불의가 있는 것이다. 이 때 교정되어야 할 것은 남의 재산을 빼앗은 개인의 행위 뿐 아니라 그런 일을 합법으로 인정한 법질서까지이다.
또한 구제되어야 할 것은 피해자의 재산 뿐 아니라, 일정한 상황에 처하면 언제든 재산을 뺏길 수도 있는 법적 지위에 처한 나머지 인종의 사람들이다. 이러한 문제의 근원은 법질서에 있으므로 그런 부정의한 법은 폐지되어야 한다.
위의 예처럼 구조적 부정의를 의미 있게 이야기하려면 결과 그 자체가 아닌 결과를 부정의한 방식으로 낳는 그 구조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형태를 지목해야 한다. 또한 그 구조의 교정된 모습이 무엇인지, 어떻게 교정해야 하는지까지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구조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 개념이 되고, 결국 결과 그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에 그저 수사적으로 덧붙인 것에 불과하다.
‘구조’라는 개념의 의미
특정 현상이 구조적 차별 때문이라고 주장하려면,
1. 어떠한 구조가 있는데
2. 이것이 어떤 방식으로 차별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3. 그 결과로 이런 현상이 생겼다
는 방식으로 실천적으로 교정되어야 할 구조의 실체를 특정하고, 이에 따른 인과관계를 제시해 입증해야 한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우대조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 개념을 읊조리는 이들은 구조의 실체를 제시하지 못하고, 어떤 방식으로 차별을 만들어내는지도 말하지 않은 채, 그저 사회현상의 한 면을 포착해 나열하면서 이것이 구조적 차별의 결과라고만 한다.
많은 사람이 이 발언의 맥락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기 때문에 구조적 차별이라는 말을 그저 ‘어떤 현상이 사회적인 요소에 영향을 받는다’는 정도의 말로 이해하고 긍정한다. 그러나 이 말은 실천적 지침을 주지 않는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람이 영화감독과 회계사 가운데 고민하다 회계사를 선택했다고 하자. A가 회계사가 된 것은 스스로의 결정이지만 그것만이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 A는 예술적이고 창의적인 일을 좋아하지만, 성격이 꼼꼼하고 팀을 조율하기보다는 혼자서 수치를 다루는 일에 편안함을 느낀다. 영화 만드는 일을 좋아해 독립영화 제작에도 참여해봤지만 온전하게 혼자서 통제권을 가지고 과업을 완수하는 일에서 더 만족도가 높았다.
만일 A가 자란 도시가 영화산업의 메카에다 어릴때부터 주변에 성공한 영화인들이 많았다면, 영화산업이 지금보다 훨씬 더 규모가 크고 번창한 사회라면 그는 영화감독이 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어릴 때 영화감독의 꿈을 키우게 한 영화들이 이제 식상하게 여겨져 감독일에 흥미를 잃을 수도 있고, 빠르게 변화는 문화에 적응하는 일이 피로하게 느껴져 어느 순간 다른 선호에 더 집중할 수도 있다.
이처럼 태어남, 도시의 환경, 산업구조의 변화, 직업의 사회적 선호, 자신의 본래적 기질 등은 모두 그 자신이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개별 인간, 또는 어떤 범주로 분류되는 집단, 또는 전체 인구 중 얼마만큼의 비율이 영화감독이 되는가는 개인적인 일이기도 하지만 사회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위 A의 예에서 알 수 있듯 A가 회계사를 선택한 현상이 구조적 부정의의 결과는 아니다.
본래적인 기질상 혼자서 꼼꼼하게 수행하는 과업을 선호하는 집단과 여럿이 창의적인 예술활동을 함께 해나가는 쪽을 선호하는 집단 사이에, 영화산업의 메카인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영화감독이 되는 비율이 다르다고 해서, 그 현상이 사회정책적 대응이 필요한 구조적 부정의의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모든 사회현상은 ‘사회’의 현상이므로 당연히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에 의해 나타난다. 어떤 사람의 삶도 오롯이 단독자로서 스스로의 의지와 결정에 의해서만 진행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모든 다름과 차이가 구조적 부정의로 교정될 대상이라면 결국 인간사회의 모든 결과는 교정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구조적 부정의’란 무엇인가?
‘구조적 성차별’이라는 주장의 맥락에서 ‘구조’ 개념은 생태학이나 사회학 이론에서 말하는 ‘구조’의 개념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없고 보아서는 안 된다. 그저 어떤 것이 ‘사회적’ 현상이라는 점만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회현상이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인 질서 수립으로 대응해야만 교정할 수 있는지, 그 실체가 부정의한 과정의 결과로 나타났는지를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 우리는 ‘구조적 부정의’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첫째, 법과 제도의 내용이 부정의한 경우이다.
둘째, 개별 행위자들이 불의를 행하여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데 법이 이를 승인하거나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경우이다.
셋째,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여건 때문에 자유를 위한 인생의 중요한 기회에 장애가 생기는 경우이다.
왜 이렇게 규정할 수 있는지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법과 제도의 내용이 부정의한 경우이다. 어떤 법률의 내용이 ‘법 앞의 평등’ 원칙에 어긋난다면 이는 구조적 차별이다. 예를 들어 특정지역 출신은 공무원이나 전문직이 될 수 없다는 내용의 법률이나 정책을 국가가 시행하거나, 할당받은 비율 이상으로는 될 수 없다거나, 가산점을 차별적으로 부여하도록 한다면 그것은 구조적인 차별이 된다.
둘째, 개별 행위자들이 불의를 행하여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데 법이 이를 승인하거나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경우이다. 불평등의 경우 개별 행위자들이 명백한 차별행위를 하는데 법이 부작위로 외면하는 경우 해당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직무능력 평가에서 더 우수한 점수를 받은 사람보다 덜 우수한 사람이 성별을 이유로 우선해서 뽑히거나, 직무능력 자격을 훨씬 완화된 조건으로 하거나, 사기업이 아예 특정 성별은 지원할 수 없다고 하는데도 법이 이를 규제하지 않는다면 이는 구조적 차별에 해당한다.
위 두가지 구조적 부정의의 특징은 결과에서의 차이를 살펴볼 필요 없이 과정 자체의 불공정함이 곧바로 교정의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어떤 집단의 구성원들이 이러한 구조적 차별 속에서도 훨씬 더 많은 노력으로 수혜집단과 비슷한 분포로 직업을 가진다 해도 이러한 결과의 수치와 무관하게 구조적 차별은 존재하는 것이다.
페미 진영에서도 오늘날 한국사회에 여성에 대한 법과 제도상의 차별은 없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물론 개별적 차원으로 불의를 가하거나 차별하는 사례는 있을 수 있다. 국가가 재산권 제도를 확립해도 도둑이나 사기범죄자가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개별적인 차별이 충분히 적발되지 않는다면, 내부고발자 제도를 보강해 불이익을 받지 않고 충분한 생활상의 보장을 받을 수 있도록 제도를 보완할 수 있다.
이러한 노력 대신 자신의 능력으로 직업을 갖고 소득을 올리고자 하는 사람들의 기회를 뺏는 것으로 대응책을 마련해서는 안 될 것이다.
페미 진영은 여성에게 구조적 차별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지만, 오히려 현재 실시되는 여성에 대한 적극적 우대조치야말로 위 두가지 구조적 불의의 전형적인 사례에 속한다.
정부 산하의 기관에서 문화예술작품의 우수성을 심사해 예산을 지원하는 사업에서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가산점을 부여받는 것은, 그 과정 자체가 ‘성별’을 이유로 불평등한 대우를 하도록 만들어진 노골적인 사례다. 특정 시기의 국립대 교원 모집 공고에서 남성인 연구자는 아예 지원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은 국가가 이러한 차별을 시행하는 것이다. 남성에게만 강제징집을 시행하는 병역제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페미 진영은 이러한 구조적 성차별 제도에 대해서는 구조적이라는 말도, 차별이라는 말도, 불평등이라는 말도 하지 않는다.
세 번째 구조적 불의의 경우를 보자. 어떤 사회든 사회구성원들의 처지는 균일하지 않다. 어떤 개인은 통제할 수 없는 여건 때문에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이 부족하다. 이로 인해 인생의 중요한 기회에 장애가 생긴다. 어떤 사람은 건강하지만 어떤 사람은 선천적 질환을 타고난다. 어떤 이는 부유하지만 어떤 이는 가난하다.
그런데 단지 처지가 균일하지 않은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와 같은 불평등한 여건이 삶에서 중요한 활동을 하는 것을 실제로 막아서는 장애가 되는 경우가 있다. 최고급 가방을 사지 못하는 여건은 삶의 장애가 아니다. 그러나 전문적 기능인이 되고 싶은데 가정형편 때문에 필요한 교육과 훈련을 받을 수 없어서 원하는 직업에 현실적으로 접근조차 할 수 없다면 이는 삶의 장애이다.
이처럼 불평등한 환경이 장애가 되어 혼자서 대응할 수 없는 취약함에 놓였을 때, 국가는 그 취약함이라는 장애를 제거해 주어야 할 의무를 진다. 이런 경우에 대응하기 위해 국가는 다른 구성원들이 각자 큰 부담없이 집합적으로 자원을 조성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통해 필요한 자원을 확보해야 한다.
페미 진영이 적극적 우대조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거론하는 ‘구조’는 유령과 같은 말
페미 진영이 말하는 구조적 차별에서 구조란 위 세가지 경우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그들은 성범죄가 구조적 차별이라 하는데 성범죄는 법적 처벌을 받는다. 고용시장은 직무능력을 판별하는 시험이나 채용절차와 같은 과정을 통해 운용되며, 이 과정을 훼손하는 행위는 처벌받고 시정된다. 빈곤에 대응하기 위한 급부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비판은 가능할지언정 남성에 비해 여성에게 불리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여성에게 주거, 빈곤, 안전, 고용 전 분야에서 특혜가 주어지는 상황이다.
여성이 정치에 진출하는데 법제도의 차별이 있는가? 여성이 공천이나 당내 경선에서 불리한 감점을 받도록 하는 정당의 당규를 국가가 제재하지 않는가? 가난한 가정의 아이가 등록금을 낼 수 없는 것처럼 개인이 통제 불가능한 물질적 조건의 결여가 남성은 없는데 여성에게만 있어서 여성이 정치가가 될 수 없는가?
당연히 그런 것은 없다. 물질적 조건의 결여 때문에 정치 진출에 장애가 된다면 이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적용된다. 예를 들어 과도한 기탁금제도는 국민의 입후보 자유와 기회의 평등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위헌 판정을 받았다.
그렇다면 페미 진영이 국회의원이나 단체장, 장관이 되는데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여성할당제가 대응하는 구조적 부정의는 무엇을 지목하는가?
이러한 물음은 자칫 악의적인 왜곡을 낳을 수 있다. 구조를 지목해야 한다는 것은 사회정책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구조적 문제가 여성의 삶에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남성의 삶에도 사회정책적 대응이 필요한 구조적 문제가 있듯 사회 구성원들의 삶에는 그러한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또한 어떤 문제는 통계적으로 특정 집단에 더 크게 드러날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구조적 문제의 성격이 남성을 법제도적으로 배제하거나 차별하는 정책을 시행해야만 해결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출산과 양육으로 인해 생기는 직업경력상의 취약함은 사회가 정책적으로 대응해야 할 문제이다. 임신·출산·육아기간의 적정한 소득보장, 유연한 근로형태의 도입, 기업이 여성고용에 더 큰 비용을 부담하지 않도록 하는 보완제도의 실시 등 대응책이 권고된다. 다른 나라의 사례도 적극 참고해 대응할 지점을 명료화 해야한다.
그렇지 않고 육아휴직을 내려는 남성에게는 휴가를 주지 않고 소득도 보전해주지 않으면서, 출산과 육아를 하지 않는 여성에게 승진에서 가점을 주거나 배타적인 기회를 제공하는 등의 정책대응은 해당 문제가 발생한 지점에 대한 대응이 전혀 되지 못한다.
또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코로나 사태에 여성이 취약하다는 언론보도들이 많이 나왔다. 팬데믹으로 인한 실업사태는 구조적 피해에 해당한다. 특히 여성이 대면 서비스 산업에 더 많이 종사해 통계적으로 더 많은 피해가 포착될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응은 실업급여를 지급하고, 직업교육과 훈련을 공적으로 지원하며, 사용자가 고용유지를 하도록 국가가 보조하고, 필요하다면 공공 일자리를 제공하는 등의 정책으로 취약한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제공되는 도움이어야 한다.
취약한 상황에 처한 사람 중 여성에게만 그런 도움을 제공하고 같은 실업 상태에 빠진 남성에게는 도움이 제공되지 않는 것은 필요한 대응에 해당하지 않는다. 즉 여성의 삶에 등장하는 구조적 문제의 성격 가운데 남성을 법제도적으로 배제하거나 차별하는 정책을 시행해야만 해결할 수 있는 성격의 문제는 없다.
구조적 차별을 주장하는 페미 진영의 속내는 할당제와 우대조치 요구
페미 진영이 주장하는 구조적 차별은 법과 제도, 구조적 불의, 국가의 급부 필요 가운데 무엇으로도 특정되지 않는 유령같은 것이다. 이들은 결과의 차이를 모두 차별에 귀속시킨다. 여성이 차별받는다는 결론을 내기 위해 통계에서 유의미하게 취급해야 할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지 않고, 설명변수를 제한적으로 열거한 후 나머지 설명되지 않는 모든 것은 다 차별이라 주장한다.
그러면서 해결책으로 여성할당제와 각종 우대조치를 요구한다. 여성에게 할당제와 우대조치를 해달라, 이것이 할당제를 주장하는 구조주의자들의 요지다.
이들은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 그리고 정말로 그것 때문인지 입증은 할 수 없지만 아무튼 여자들이 차별받으니 할당제와 우대조치를 해달라”고 말하는 것은 궁색하고 구차하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구조적 차별’이라는 수사를 이용한다. 사람들이 ‘사회구조적’ 문제라는 말을 흔히 쓰니 다른 맥락인데도 타당한 것처럼 둔갑시켜 마치 내용 있는 말인 듯 뭉뚱그려 쓰는 것이다.
결국 정의당, 민주당, 페미진영 언론 등 구조적 차별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불평등’은 할당제를 정당화하는 이유로서의 불평등이다. 구조적 차별, 구조적 불평등이라는 말은 할당제와 우대조치라는 그들의 정책요구와 연결되지 않는다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불평등과 사실상 견해차이가 없다.
가난으로 인해 도움이 필요한 사람한테 급부를 주는 것, 경력단절을 예방하고 해결하는 것, 범죄를 처벌하고 예방의 필요를 느끼는 것, 주택을 보급하고 생활비를 보조하는 것, 자살을 할 정도의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상담을 비롯한 조력을 해주는 것 등 다들 동의하는 일이다. 이런 동의지점을 제거하면 남는 것은 결국 “할당제와 같은 여성우대조치를 할 것인가 말것인가” 여부다.
그런데 여성에게만 이러한 혜택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려면 앞서 열거한 세 가지, 즉 국가가 구조적 불의에 대응하는 전통적인 임무를 하고 나서도 뭔가 차별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한 것은 결과의 차이밖에 없다. 법과 제도상의 차별이 없고, 개별 행위자의 불의를 제재하고, 물질적 조건의 취약성에 대응하는 조치가 공정하게 제공되는 현실을 부인할 수는 없으니, 결과의 평등을 강제로 만들어라 요구하면서 정체가 불분명한 구조적 차별을 주장하는 것이다.
결국 구조적 차별이라 우기는 것은 국가의 합헌적 임무수행으로도 남은 결과의 차이를 모두 위헌적인 할당제와 우대조치로 해결해야 한다는 페미 진영의 신념을 표명한 것에 불과하다. 페미 진영 인사들은 모든 차별은 구조적이라고 한다. 그런식으로 말하면 구조적이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게 된다. 모든 것을 구조에 걸리도록 얼마든지 수사적으로 만들 수 있다.
뚜렷하게 적실한 대응을 할 수 있는 세 가지 경우에 들어가는지 분석조차 하지 않고 구조적 차별이 있다고만 말하는 것은 텅 빈 개념을 위장하기 위한 속임수이다. 이들이 구조적 차별이라고 할 때 구조는 할당제가 필요하다고 하기 위해 동원하는 수사에 불과하다.
세계 108위라는 성격차 통계를 오도해 성차별 국가라 주장하는 것, 성범죄의 피해자 다수가 여성이니 여성은 구조적 피해자라 주장하는 것, 성별임금격차가 존재하니 성차별이라고 하는 것 모두 같다.
정체성이 아니라 취약성으로
우대조치에 집중하는 것은 오히려 실질적인 생활여건의 개선이나 물질적인 급부를 통한 장애의 제거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여성할당제에 대한 혜택으로 수억원의 국고지원을 받은 국민혁명당 사례를 보자. 이러한 공적자원의 투입은 실제 여성들이 경력단절 등으로 인해 처한 취약함을 해결하는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핵심은 정체성이 아니라 필요에 있다. 할당제를 비롯한 우대조치는 과도기적 정책으로도 정당하지 않다. 집단적 정체성이 아닌 개인의 취약성에 대처하는 방향으로 정책과 공적자원이 쓰여야 한다.
대선 당시 윤석열 후보가 구조적 차원의 성차별은 없다고 발언한 이후 민주당의 인사들과 페미 진영의 많은 매체들이 이를 비난하고 나섰다. 망언이라는 비난도 서슴치 않는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누구도 자신들이 말하는 구조가 무엇인지 제시하지 않는다. 진중권 교수가 공식적으로 여성을 차별하는 제도는 없다고 발언했을 때 누구도 이를 비난하지 않았다. 진씨의 발언과 윤후보의 발언은 같은 의미의 것일수도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합리적 토론이나 설명은 없고 그저 비난과 공격만이 난무한다.
앞서 설명했듯 적극적 우대조치를 정당화하기 위한 맥락에서 쓰는 ‘구조적 차별’이라는 말은 이기적이며 불의한 요구를 가리기 위한 위장 언어전술이다. 아무런 개념정의도, 입증도 없는 페미진영의 공세에 휘둘릴 필요는 없다.
구성원들의 삶에 사회가 정책적으로 대응할 구조적 문제가 있다면, 바로 그 잘못된 구조를 교정하는 대응을 하면 된다. 성별이라는 집단적 정체성이 아닌 국민 각자가 처한 취약함에 대처하는 것이 이들의 불의한 개념공세에 대응할 수 있는 정의롭고 정당한 방향이다.
기사 출처: ‘구조적 성차별이 존재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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