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던 피터슨이 좌파에게 보내는 메시지

피터슨에 대한 열광

근래 영미권에서 심리학자 조던 피터슨이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젊은이들이 그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그의 본래 전공영역이 아닌 다른 데 있다. 피터슨은 통합된 사회에 대한 비전을 상실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PC)과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에 염증을 느끼는 대중에게 직설적인 비판을 제시한다.

특히 그는 담론적으로 소외됐다고 느끼는 젊은 남성들에게 ‘어깨를 죽 펴라’는 자기계발 메시지를 던짐으로써 인해 열광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그의 몇몇 유튜브 영상은 천만 단위의 조회수를 올리는 중이다.


-성별 임금격차에 대해 논쟁하는 조던 피터슨

물론 일부 영미권 진보언론과 논평가들은 ‘대안우파’, ‘남성우월주의자’, ‘안티페미니스트’, ‘파시스트’ 등 현대 사회에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욕설을 동원해서 그를 낙인찍는 방식으로 신경질을 부리곤 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지적인 진보성향 논평가들(노엄 촘스키·슬라보예 지젝 등)은 보다 조심스러운 반응이다.

더 나아가 지젝은 <인더펜던트>에 기고한 칼럼에서 “왜 사람들은 조던 피터슨을 설득력 있다고 여길까? 좌파들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 못 했기 때문”이라고 솔직한 견해를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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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슨이 성공하는 이유

전통적인 좌파에게 피터슨은 그다지 지적으로 흥미로운 사람은 아니다. 그는 보수적인 반공주의자이고 고지식하고 종교적인 사람이다. 그는 요새의 정체성 정치가 과거의 급진 마르크스주의 사상에서 곧바로 도출된다고 진지하게 믿는다는 점에서 몇몇 좌파 논평가로부터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그리고 그는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자유지상주의자인 동시에 자신이 강조하는 개인의 자유가 사회경제적으로 어떤 한계를 갖는지에 대해서도 완전히 무지한 사람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말해 평소였다면 진지하게 상대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피터슨의 고지식함(흥미롭게도 그는 남성인권운동을 운운하는 대안우파에 대해서 또 다른 형태의 정체성 정치를 들고나오는 것은 반대한다고 비판한다)은 PC를 비판하는 데서 예기치 못한 진가를 발휘한다. 그는 과도한 PC 성향에 비판적인 좌파라 하더라도 다시 논의하기 성가시다고 생각하는 논제들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논파한다.

예를 들어 페미니스트들이 임금격차 통계를 잘못 해석하는 방식, 난민에 대한 즉각적인 시민권 부여를 외치는 인권운동가가 그들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명확한 삶의 방식 차이에 대해 침묵하는 지점, 소수자를 지칭하는 언어를 검열한다고 해서 사회가 정말 관용적으로 바뀌는지에 대한 회의적 견해를 되짚는다. 주류 언론과 논평가 중 아무도 꺼내지 않는 이런 논점들을 피터슨은 거침없이 지적하는 것이다.

조던 피터슨

만약 좌파의 본래 역할이 교조화된 통념에 대한 통렬한 이의제기에 있다면, 이제는 피터슨이 그 역할을 대체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따라서 그가 근래 영미권 젊은이 사이에서 기존 주류 언론과 평론가의 권위에 도전하는 힙(hip)한 인물로 부상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는 또한 좌파의 입장에서도 확실히 무언가 잘못돼 가고 있다는 방증이다. 피터슨이라는 반공주의 성향의 우파가 좌파가 원래 했던 역할을 그것도 (좌파에게 결여된 미덕인) 성실성을 가지고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보가 생각해야 할 점

어떤 성실한 진보주의자들은 PC와 정체성 정치를 비판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들이 산적해 있다고 반론할 것이다(대표적으로 노엄 촘스키). 그러나 역으로 이런 반론이야말로 일종의 현실도피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맞다.

진보주의자의 입장에서 볼 때 세상에는 소위 래디컬 페미니스트와 PC충(忠)과 싸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다. 최저임금인상 스케줄을 사수하는 것, 소수자에 대한 가짜뉴스와 증오의 재생산을 저지하는 것,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는 것, 국가에게 인민의 기본적 생활수준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는 것 등이 있다.

문제는 좌파의 정치적 상상력을 사로잡고 있는 PC의 규범이 이런 공통의 의제에서 어깨를 같이해야 할 사람들과의 대화를 방해한다는 점이다.

난민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중단해야 한다고? 그렇다면 난민과 우리나라 사람 사이의 문화적 차이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여성의 임금이 남성보다 낮다고? 그렇다면 ‘한남충’, ‘냄져’ 운운하는 증오의 언설을 설파하기 전에 왜 그런 격차가 나는지 그 이유(예 경력단절)를 제대로 짚고 대안을 논의하는 게 우선이다.

국가가 시민의 생활수준을 보장하면 재정이 파탄 나고 경제의 활력이 줄어든다는 보수경제지의 통념에 사로잡힌 자영업자를 수준 낮은 우민으로 치부하기 전에 왜 그것이 사실이 아닌지에 대한 설명을 하고, 그들을 위한 사회 프로그램을 마련할 수 있어야 한다.

PC 규범의 문제는 애초 문제해결에 필수적인 이런 대화를 중단시키고 사회적 고립을 자초한다는 데 있다. 한편 PC 규범이 논의의 금기를 여기저기에 설정할 동안에 피터슨 같은 반공주의 우파가 애초에 좌파가 던졌어야 할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비록 그는 거기에 대해 잘못된 대답을 내놓지만 말이다. 좌파들은 이런 사태를 부끄러워해야 마땅하다. 이들이 문제를 논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 전망은 불투명하다.

한국의 경우 포스트 386 운동권 세대가 언론계와 문화예술계 일각을 장악하는 데서 오는 착시효과(자신이 설파하는 담론이 주류이며 다수라는 환상)는 그리 오래 지속하지 않을 것이다. 예멘 난민문제에 대해 이미 드러난 언론과 대중적 반응 사이의 극명한 차이는 앞으로 누가 실제로는 고립될 것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트럼프가 집권하고 마크롱이 의회 다수석을 차지하는 미래는 멀지 않다.

경제학 석사. 프리랜서 작가. '포비아 페미니즘'(2017), '혐오의 미러링'(2016),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고유명'(2014), '일베의 사상'(2013) 단행본 출간. '2014년 변신하는 리바이어던과 감정의 정치'로 창작과 비평 사회인문평론상 수상과 2016년 일본 '겐론'지 번역. paxwonik@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