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가 아닌 ‘386세대’ 정신분석 필요하다

박가분 승인 2019.05.08 12:05 | 최종 수정 2020.06.25 13:47 의견 0
 

최근 <시사인> 기사를 위시해서 ‘20대 (남성)은 무엇을 생각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각종 담론이 양산되는 중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 질문을 대체 누가 제기하느냐’라는 역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미셸 푸코에 따르면 담론이라는 것은 권력의지의 반영이자 그것이 표현되고 행사되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이런 푸코식 권력론의 기본 명제로 돌아가 지금의 사태를 진지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

시사인 606호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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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보면 지금 제기되는 20대론은 (이하에 더 해명하겠지만) 결국 ‘386세대가 20대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라는 문제로 귀착된다. 그 담론의 ‘최종 수요자’가 각종 여론조사 전문기관에 20대 여론에 대한 분석을 의뢰할만한 자금력과 위기의식을 가진 진보진영 내 386세대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보수언론과 야당 그리고 경제지도 나름의 20대론을 제기하지만, 이들 진보성향 386세대만큼 절실하거나 고민이 깊지 않다. 어차피 누워서 굿이나 보고 떡이나 주워 먹자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한편 정작 20대 자신은 자신을 하나의 분절된 세대로 분석할 유인이 없다. 애초에 20대론은 20대를 ‘타자’로 상정함으로써 도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20대는 무엇을 생각하는가’라는 질문 자체가 문재인 정부뿐만 아니라 범여권 전체에 대한 20대(남성)의 지지율 하락에서 촉발된 것이다. 정의당의 입장에서 봐도 바른미래당보다 20대 지지율에서 밀리는 것은 고민스러운 지점이다. 20대 여성에서는 문재인 정부에 대한 지지율이 여전히 높지만 20대 전체 지지율이 크게 하락한 것에서 엿보이듯이 결집력이 더 강한 것은 젊은 남성이다.

한편 정당, 언론, 사회단체의 중진을 차지한 기성세대 진보주의자들은 이들의 여론에 대해 ‘분노한남자들’ 식의 조롱으로 일관하다가 이제서야 진지하게 취급하기 시작했다. 20대 남성 심층 여론조사에 기반한 특집기사를 최근에 낸 <시사인>의 태세 전환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이들의 분석도 기껏해야 ‘20대 남성은 보수화되었다’, ‘20대 남성의 상당수는 안티페미니스트다’와 같은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거기서 촉발되는 담론도 ‘왜 20대 남성은 보수화되었는가? 왜 안티페미 성향이 되었는가’ 같은 피상적인 수준의 질문을 맴돌고 있다.

애초에 이러한 담론이 왜 피상적인가? 이러한 담론이 제기하는 질문 자체가 크게 봐서 ①2030세대가 진보를 지지하는 것이 당연했던 과거의 상황 ②진보진영이 페미니즘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야만 했던 과거의 상황을 ‘정상적 규범’으로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성세대 진보주의자들은 20대 젊은이들에게 성찰할 것을 요구하지만 정작 그들은 자신의 전제에 대해 제대로 성찰한 경험이 없다. 사실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해도 좋다. 그들이 지금까지 정치와 담론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필자는 이 기성세대 진보주의자의 이 두 가지 핵심적 맹목성이 다시금 ‘386세대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생각한다. 박권일이 제안한 ‘한국형 평등주의’라는 개념을 조금 뒤틀자면, 마찬가지로 ‘한국형 진보주의’자들의 맹목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이 보이는 맹목성은 90년대 학번이든, 2000년대 학번이든, 지금도 천연기념물처럼 남아 있는 현역 캠퍼스 운동권이든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이들 모두 386세대의 특수한 역사적 경험을 ‘정상적 규범’으로 수용한다는 점에서 가족 유사성을 갖는다. 즉 386 세대의 역사적 경험을 (무)의식적으로 하나의 ‘모델’ 혹은 ‘이념형’으로 수용함으로써 기성 진보주의자의 집단 멘털리티가 형성되는 것이다.

실제로 386세대 이후의 진보주의자도 5·18 민주화 항쟁, 6월 항쟁, 노동자 대투쟁 등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386세대 자신의 공식적 기억과 서사를 학습하는 과정을 통해 ‘의식화’됐다. 그렇게 해서 진보성향 386세대는 언론, 문화, 정치 제 분야에서 헤게모니를 쥘 수 있었다.

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그렇다면 386세대는 왜 그렇게 중요한가? 386세대는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치열하며 영민했을 뿐만 아니라 성공적인 세대이다. 그들 중 상당수는 고도 성장기 아래 경제적 성공을 맛보았고 민주화 이후 보수와 진보 어느 쪽으로 투신했든 성공적인 정치권력 교체를 한 번쯤은 경험했다.

젊은 시절 그들은 자신이 역사의 의미를 통찰한다고 믿을 정도로 패기 넘쳤지만 동시에 분신하거나 투신한 동료에 대한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만큼 절실함과 치열함으로 분투했던 세대인 그들은 산업화 세대와 마찬가지로 맨땅에 헤딩하다시피 해서 지금까지의 사회를 일구어냈다.

그들은 이미 ‘역사’가 되었기 때문에 더더욱 이들을 한번쯤은 흥미로운 연구 ‘대상’으로서 ‘객관화=타자화’해서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마치 그들이 지금의 20대나 과거 산업화 세대를 고찰하려 하듯이 말이다.

그 필요성을 제기하는 지금 이 시론격의 글에서 필자는 이들 386세대에 대한 대단한 정신분석이나 진단을 이끌어낼 만한 깜냥은 아직 없다. 다만 분석의 단초는 386세대가 자신이 격렬히 대립했던 산업화 세대나 독재정권과 의외로 많은 것을 공유하거나 혹은 그들에 의해 조건 지워졌다는 이면의 진실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본다.

가령 혹자가 말하듯 386세대가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되는 독재정권의 ‘국민교육헌장’을 진지하게 내면화해서 받아들였기 때문에 오히려 뒤에서 살인과 고문과 온갖 추잡한 부조리를 저지른 독재정권을 견딜 수 없었다는 평가에 필자는 완전히 동의한다.

그렇기에 가장 진보적인 세대였다고 자부하는 이들마저 독재정권이 주입한 목적론적 역사관, 배타적 민족주의와 집단주의 등의 이념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던 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토왜’라는 말을 자랑스럽게 입에 주워 담는 일각의 천박한 과격 민족주의 성향을 일정 부분 설명해준다.

한편 자신의 ‘세대감각’을 벗어날 수 없었다고 진솔하게 고백한 문학평론가 김윤식의 눈에도 이 같은 아이러니가 포착되었던 것 같다.

386세대의 어떤 연구자는 국민교육헌장을 외며 자랐다 하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 국가, 민족이 개인의 어떤 의식보다 우위에 선다는 것. 존재 자체에서 오는 고독, 불안, 공포 따위란 꿈도 꾸지 마라, 이 땅에 태어날 때부터 민족주의가 주어졌으니까. 이런 작가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아마도 4·19세대나 전중세대처럼 세대감각을 움켜쥐고 계속 글을 썼을 터이지요.

이뿐만이 아니다. 집단적 교육을 통해 바람직한 인간형을 ‘주조’해낼 수 있다고 믿은 독재정권의 전체주의적 교육관의 일부 요소는 386세대에도 이식되었다. 이는 ‘20대 지지율이 하락한 것은 보수 정권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 한 여당 국회의원(사진)의 발언뿐만 아니라,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를 주장한 일부 전교조 교사의 주장으로도 면면히 이어진다.

2017년 2월 23일 국회 원내대표실에서 열린 박근혜정부 4년평가 기자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는 홍익표 의원(출처 더불어민주당·사진 오른쪽)
2017년 2월 23일 국회 원내대표실에서 열린 박근혜정부 4년평가 기자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는 홍익표 의원(출처 더불어민주당·사진 오른쪽)

아울러 ‘선진문명 따라잡기(catch-up) 전략’이 독재정권 아래 산업화(중화학 공업 육성) 프로젝트로 구현되었다면, 386세대에게 이같은 기획은 정치 이데올로기의 수용 문제로 재해석되었다. 박정희 정권이 입안하고 실행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사실은 소련의 경제개발 계획의 계승이었다면, 386세대는 이러한 정책의 철학적 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역사적 유물론의 주제의식에 천착했다.

이들이 의식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찬동했든 안했든, 그에 대해 정확히 알았든 몰랐든, 이들 모두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밟아야 할 국면들이 존재한다는 ‘역사발전 단계론’을 수용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역사발전 단계론의 문맥에서 마르크스주의든 주체사상이든 네오리버럴리즘이든 각종 이데올로기를 수용했다.

심지어 근대사회의 질곡을 극복하겠답시고 들뢰즈, 푸코, 데리다, 라캉 등을 주워 담던 이들도 정작 선진국의 담론에 뒤처지면 안 된다는 초조감, 즉 역사 발전단계론의 자장 안에 있었다. 이처럼 신좌파 이데올로기에 대한 수용도 바로 이런 역사적 단계론의 문맥 아래 이뤄졌다.

프랑스의 68혁명을 마치 한번쯤은 거쳤어야만 했던 낭만쯤으로 묘사하는 박권일·우석훈의 <88만원 세대> 서문의 한 대목은 물론, 페미니즘은 이제 피할 수 없는 대세이니 당랑거철로 맞서지 말라고 20대에게 훈계하던 한 학자의 발언에서 엿볼 수 있듯이, 역사발전 단계론은 386 이후 세대 진보주의자의 상상력마저 사로잡고 있었다.

1968년 5월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된 68운동
1968년 5월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된 68운동

실제로 필자는 ‘우리도 68혁명과 같은 카니발을 한 번쯤 겪어봐야 하기 때문에 메갈리아를 옹호할 수밖에 없었다(?)’는 한 운동권 청년의 변명조 발언을 듣고 어이가 없었던 적이 있는데, 그 역시 386세대의 세계관과 연동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20대의 이기적 개인주의와 경쟁주의(?)를 나무라는 386세대와 이들의 아류는 자신이 권유하는 ‘공동체적 온정주의’에 대한 체험이 실은 학연에 뿌리내린 것이라는 사실에도 반쯤 눈을 감는다. 386세대의 기억과 세계관 속에서 자신의 의식화가 이루어졌던 캠퍼스는 특별한 장소이다.

지연과 혈연이라는 낡은 봉건적 습속에 대한 ‘해방’의 다른 이름은 ‘학연’이었다. 기성세대 진보주의자들이 늦바람에 다시 시도하는 이상적 공동체주의 프로젝트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학창 시절 캠퍼스에서 느꼈던 해방적 경험을 복제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한편 386세대 이후의 진보주의자들은 386세대가 구축한 학연과 학벌주의를 그들 자신처럼 실용적으로 활용하기보다는 ‘왜 나의 캠퍼스에는 선배들이 누렸던 낭만이 없을까’라는 식의 다소 신경증적 콤플렉스의 형태로 계승했다.

지금의 구세대 진보는 현재의 20대에게 자신들처럼 회귀해야 할 이상, 상실된 유토피아, 반드시 거치지 않으면 안 될 역사의 단계를 겪지 못했다는 초조함 따위의 정신적 콤플렉스가 없다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싫은 건 싫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는 20대에게 초조감을 느끼는 쪽은 오히려 구세대 진보주의자들이다.

386세대와 그들의 세계관을 공유하는 구세대 진보에게 지금의 20대는 완전한 ‘외계인’이듯이, 지금의 20대에게야말로 지금의 진보는 별나라에서 온 외계인이다. 미래세대와의 소통 단절 문제는 앞서 주장했듯이 결국 386세대가 남긴 유산에 대한 평가 문제로 직결된다.

386세대는 역사상 가장 진취적이고 성공적인 세대였지만 지금은 과거의 역사이다. 그리고 이들의 사고방식과 세계관은 현재 한국사회의 자기인식과 발전을 촉진하기보다는 오히려 방해하는 질곡으로 작용하고 있다.현재의 진보진영과 담론이 미래세대를 수용할 그릇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단적인 사례이다. 이것이 386세대를 하나의 ‘문제’로서 고찰하고 그 세대의 집단심리에 대한 정신분석과 해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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