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운영된 ‘인권’ 제도는 어떻게 ‘괴물’이 됐나 1

박가분 승인 2018.08.01 19:29 | 최종 수정 2020.06.26 15:21 의견 0

우리는 관료제가 타성적인 조직논리와 결합할 때 어떻게 쉽게 부패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듣곤 한다. 실제로 국가와 기업의 잘못된 제도가 사람을 해치는 괴물로 돌변하는 비극을 우리는 여러 번 목격했다. 하지만 이러한 비극이 ‘인권’이라는 미명 아래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은 쉽게 상상하지못한다. 그런데 실제로 그러한 일이 지난해 전북의 한 중학교에서 일어났다.

당시 중학교에서 재직 중이던 고 송경진 교사는 학생을 성추행 했다는 누명을 쓰고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지난 2017년 여름 자살로 세상을 떠났다. 학부모와 학생들의 증언마저 무시한 부실한 끼워 맞추기 조사, 전북 학생교육인권센터의 무리한 실적주의, ‘매뉴얼’을 핑계로 댄 공무원들의 무사안일주의, 교육감의 조직보위 논리, 이 모든 것들이 ‘전라북도 학생인권조례’를 내세우며 악용한 ‘가해자’들이다.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거나, 권한을 가진 누군가 사태에 개입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일어나지 않아도 되었을 비극이다. 이 일이 일어난 원인을 더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 송교사의 아내 강하정씨와의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사건 후 1년이 지나며 한동안 떠들썩했던 언론의 관심이 시들해졌지만 강씨에게 사건은 여전히 생생하다. 그는 인터뷰 중간중간 매일 지난해의 사건이 반복해서 떠오른다며 몸서리를 쳤다.

송 교사가 최초 무고를 당한 지 1주년 되는 지난 4월 19일, 강씨는 전북교육청에 손수 진정을 냈고 이후 5월 15일 스승의 날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도 여러 단체와 함께 집회를 벌이며 진정서를 접수했다.

송경진 교사 사망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단체들이 5월 15일 서울시 중구 국가위원회 앞에서 학생인권조례 폐지 촉구와 국가위원회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 ⓒ 김승한 기자
송경진 교사 사망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단체들이 5월 15일 서울시 중구 국가위원회 앞에서 학생인권조례 폐지 촉구와 국가위원회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 ⓒ 김승한 기자

지난 1년간 멀리서 들려오는 소식만 봐도 강씨의 절박함이 느껴진다. 그는 사건 이후 아고라, 국민신문고, 청와대청원, 기자회견 등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언로를 동원해 남편의 사건을 알렸다. 문재인 대통령, 김정숙 여사, 정세균 (전)국회의장 앞으로 사건에 대한 편지를 손수 보냈지만, 의장실에서는 경찰수사를 예의주시하겠다는 답변만 돌아왔고,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는 최근 사건 관련자에게 무혐의 처분을 내린 전주지검으로 돌려보내졌다. 현재까지 고인의 억울함을 풀어줄 만한 가시적인 조치는 이뤄지지 않았다. 사건의 상처를 다시 후벼 파는 것은 아닌가, 걱정스러웠지만 사건 이후 1년간 어떤 심경인지 물어보았다.

강하정씨와의 심층 인터뷰는 총 3회 게재됩니다. 편집자주

사건 후 1년, “고립된 섬과 같았다”

인터뷰는 강씨의 자택에서 이루어졌다. 전북의 한 마을에 도착한 후 강씨의 안내를 받고 들어간 후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각종 의료기기와 책상 위에 즐비한 약통이었다. 작은 체구에 지친 기색이 역력한 강씨에게 그동안 많이 편찮으셨냐고 조심스럽게 묻자 “그동안 약을 달고 다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평소 지병을 앓고 있던 강씨는 사건 이후 병세가 악화되었다고 한다.

특히 지난달 초 ‘매뉴얼대로 사건을 처리했다’는 명목으로 남편의 죽음에 책임 있는 자들이 줄줄이 검찰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고 사법정의가 구현될 것이라는 희망이 사라지면서 병세가 더욱 심해졌다고 한다. 그는 근황을 말하는 중에 남편에 대해서도 운을 띄웠다.

사건 전에는 남편이 계속 보살펴왔어요. 집에 있는 환자용 침대도 의료기기도 손수 다 샀고, 청소, 빨래, 취사, 심지어 목욕도 도맡아 했습니다. 지극정성으로 돌보았습니다.

그동안 자신을 헌신적으로 돌본 남편이 자신의 삶에 유일한 버팀목이었다고 말했다. 책장에 놓인 남편과의 다정한 사진으로 강씨와의 살아생전 각별한 관계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남편을 회상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허탈함과 황망함이 고스란히 전해왔다. 그렇다면 주변에서는 그에게 버팀목이 되어줄까. 그는 인터뷰 내내 자신의 처지를 “고립된 섬”에 비유했다.

제 주위에는 돕는 사람이 없습니다. 고립된 섬 같아요. 마음으로는 돕고 싶다는 사람들은 많이 있는데 나서서 행동으로 옮길 수 없는 자신들을 이해해달라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제 그만하고 마음의 안정을 찾으라고 합니다.

 

저는 그들에게 도움을 강요할 수가 없습니다. 저도 비겁했으면 죽은 사람은 잊어버리고 남은 우리라도 잘 살자고 다른 생각을 했어야 했겠지요. 그러나 저는 비겁자가 아닙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부당함과 억울함은 계속 외치고 깩- 소리라도 하고 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강씨의 고립감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강씨는 ‘닫힌’ 지역사회 내에 만연한 유착관계를 지목했다. 그는 관련자들에 대한 전주지검의 무혐의 처분에 대해 허탈해하면서도 ‘내심 예상했던 바’였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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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현직인) 김승환 교육감은 전북대학교 법대 교수였고, 남편의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남편을 가해자였다고 몰고 간 송기춘 전북학생인권심의위원 역시 전북대 법대 교수입니다. 또 최근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이들을 무혐의 처분한 지방검찰청 관계자 다수가 전북대 법대 출신이거나 교육감과 학연, 지연 등 인맥으로 연결된 사람들임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이어서 그는 처음부터 관련자들에 대해 검찰이 무혐의 처분을 내릴 작정으로 요식행위를 벌였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미 1월에 자신을 부른 검사가 ‘고소를 취하할 의향이 없느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송교사를 위해 탄원서를 쓴 학생들은 조사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저는 납득할 수도 없고 그럴 생각은 전혀 없다고 했지요. 그러면 최종진술서를 쓰라고 용지 3장을 주면서 하고 싶은 말 다 써도 된다고 하더군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으니 집에 가서 작성해서 변호사 편에 제출한다고 했지요. 그 후 A4 용지 13장의 진술서를 작성하고 별첨파일을 라면 한 상자 분량으로 첨부하여 검찰에 제출했습니다. 그 피눈물 나는 자료를 전혀 반영하지 않더군요.

변호사 선임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있었다는 것도 드러났다. 남편의 지인을 형사소송 변호사를 선임하려 했지만, 오히려 그 과정에서 지역사회의 압력을 절감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남편 친구가 변호를 맡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 지역이 좁은 바닥이다 보니 주변의 압력으로 난처해하더군요. 보다 못한 제가 먼저 관두라고 말을 꺼냈습니다. 그랬더니 자기도 사실은 처지가 너무 곤란하다고 속내를 털어놓더라고요.

언론의 성급한 기사가 화를 부르다

그는 인터뷰 중간중간 사건 이후 무관심으로 돌아선 언론에 대한 극도의 불신을 숨기지 않았다. 실은 인터뷰를 요청한 필자도 믿을 수 있을지 반신반의했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사정을 들어보니 언론 불신의 근원은 보다 뿌리 깊은 곳에 있었다.

그는 이번 사건의 발단은 언론의 성급한 기사였다고 말했다. 송교사를 오해한 학부모 관계자의 한쪽 주장만 받아 적은 <뉴시스>의 기사가 사실상 송 교사를 징계하는 방침을 굳어지게 한 결정적인 계기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건이 언론에 보도된 시점이 매우 놀라웠다.

뉴시스의 기자가 기사를 내기 전에 교육청 인지 내용과 조사 여부 등을 취재했다고 합니다. 기사는 사건 당일인 4월 19일 2시 55분에 났습니다. 부안교육지원청에 서면으로 보고된 시각이 3시 24분인데 정식으로 서면보고도 하기 전에 기사가 먼저 난 거예요. 그것도 부안교육지원청이 아닌 전라북도교육청 발 기사로 말이죠.

 

기자는 부안교육지원청 교육과장과 두 차례 통화를 해서 성추행을 확인했다고 했고 학교에 가서 장학사 O모씨로부터 7명의 학생이 성추행을 당했거나 목격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겁니다. 신고자인 학생부장 교사부터 시작해서 부안교육지원청의 장학사와 교육국장, 기자까지 모두 성추행 사건이라고 이미 결정을 내리고 시작된 일입니다.

사건 당일 난 기사를 통해 학교당국뿐만 아니라 부안교육지원청, 전북교육청 사이에서도 ‘교사에 의한 성폭력 사건’ 프레임이 굳어지고 만 것이다. 기사화된 사건은 성추행을 기정사실화하는 데 기여했지만 정작 기자는 후일 ‘자신은 증언을 들은 대로 기사화했을 뿐’이라고 발뺌했다.

그렇다면 나중에라도 송경진 교사 사건을 제대로 알린 기사는 없었을까. 관련 기사들을 찾아보았지만 ‘인권조례’나 ‘진보교육감’에 대한 정치적 공격을 의도로 한 기사 외에는 대부분 사건에 대한 단발성 기사로 그쳤을 뿐 사건의 내막과 귀추를 보다 자세히 파헤치는 기사는 찾아볼 수 없었다. 강씨는 이와 관련한 속사정을 털어놓았다. 강씨는 자조적인 어조로 “언론에 의해 죽다 살아난다”고 덧붙였다.

저를 취재했던 오마이뉴스 모 기자가 한번은 저에게 너무 죄송하다는 연락을 해왔습니다. 기사를 어떻게든 내려고 했는데, 데스크와의 상의 끝에 짤막한 두 개의 기사로 분리해서 겨우 냈다고 합니다. 보다 완곡한 논조로 말입니다.

 

전북교육청 상주기자들의 기사도 상당수 데스크에서 잘렸다고 합니다. 제가 언론을 어떻게 보는지 아시겠습니까. 인터뷰하라고 해서 기다리는데 왜 안 오냐고 하면 캔슬됐다고 그제서야 말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최초의 거짓말과 동료 교사와의 악연

송 교사에게 성추행·성희롱이라는 누명이 씌워진 것은 사소한 계기였다. 야간자율학습에서 빠진 이유를 학부모에게 추궁당한 한 여학생은 순간적으로 치기 어린 거짓말을 했다. “담임선생(송교사)이 짝꿍의 허벅지를 만지고 나에게는 폭언을 해서 야간자율학습을 빠진다는 얘기를 하지 않고 집에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거짓말의 동기마저도 1학년을 귀가조치한 다른 교사와 송교사를 착각한 데서 비롯된 오해였다. 사소한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었던 일이지만 학생의 거짓말은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치달았다.

평소 송 교사와 사이가 좋지 않던 인성인권부장(이하 학생부장) 교사가 학생들의 잡담을 듣고 학교전담경찰관, 부안교육지원청에 성추행 사건으로 신고한 것이다. 이어 전북교육청 그리고 학생인권교육센터에도 전달됐다. 한편 강씨는 학생부장 교사가 평소 송 교사를 미워하고 심지어 폭력성향을 보였다고 주장했다.

그 교사는 고인과 사범대학교 동기였습니다. 남들 앞에서는 학교 동기라고 친한 척하고 둘만 있는 공간에서는 돌변하여 폭언을 하고, 멱살잡이를 하고, 심지어 2016년 여름방학 직전에는 남편의 뺨까지 때렸답니다. 그 날 그 사람에게 뺨을 맞고 왼쪽 뺨이 벌개진 채 돌아와 남편이 서럽게 울었습니다. 아무도 없을 때 갑작스럽게 폭력과 폭언을 행사하니 증거나 증인이 없어서 고발도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건이 난 지난해가 6년차였습니다. 문제의 중학교에서 근무하는 마지막 해였지요. 1년만 참으면 다른 학교로 전근을 하니 버텨보겠다고 하다가 그런 황망한 일을 당하신 것입니다.

사건 직후 아이들과 격리된 송 교사

더 큰 문제는 성추행 신고와 동시에 송 교사에게 지울 수 없는 낙인이 따라붙었다는 것이다. 앞서 보았듯이 이미 언론에 기사가 난 상황에서 신고는 기정사실이 되고 말았다. 나중에는 이 모든 것이 오해에서 비롯된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학생이 실토하자 학부모의 탄원이 이어졌지만 교사에 붙은 낙인은 살아생전 떨어지지 않았다.

사건 직후 송 교사에게 내려진 처분은 학생들과 ‘격리’였다. 이는 이후 송교사의 반론권을 두고두고 제약하는 계기가 된다. 흡사 영화 <더 헌트>(미즈 미켈슨 주연)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영화에서도 이와 유사한 상황이 벌어진다. 루카스라는 남자 보육교사를 잘 따르던 상상력이 풍부한 한 어린이집 원생 클라라는 어느 날 루카스에게 부적절한 행동을 하고 꾸짖음을 듣는다. 속상해하던 클라라에게 보육원 원장이 무슨 일인지 묻자 문득 다른 짓궂은 동네 오빠들이 보여준 남성 성기 사진을 떠올리며 원장에게 루카스가 자신에게 성기를 노출했다는 거짓말을 꾸며낸다.

영화 '더 헌트' 포스터
영화 '더 헌트' 포스터

이 일로 루카스는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가 오해를 풀고 해명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그에게 닥친 첫 번째 조치는 원생뿐만 아니라 다른 보육교사들과의 격리조치였다. 이 일로 그는 지역사회에서도 완전히 고립된 처지가 된다. 이후 그는 살아도 살아있는 것 같지 않은 신세가 된다.

맨 처음부터 학교에서 사건과 관련한 어떠한 발언도 못하게 했습니다. 4월 19일 사건이 일어난 당일, 남편과 교장 그리고 학생부장 교사와의 3자 대면을 했지만 학생에게 오해를 풀고 싶다는 송 교사의 말은 일언지하에 거부당했습니다.

아직 그 당시만 해도 송 교사는 학생들과 대화하면 오해가 풀릴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다.

당황한 남편이 점심시간에 전후사정을 바른대로 말해달라고 학생한테 다가갔더니 아이들이 도망갔습니다. 사태가 돌아가는 걸 몰랐던 철부지 아이들은 처음에는 선생을 피해 술래잡기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합니다.

 

조금 있다가 학생부장 선생이 나타나서 ‘왜 애들한테 말을 시키냐’고 남편을 제재하고 아이들한테도 ‘수학선생님하고 말하지 말라’고 남편으로부터 격리시켰습니다. 그 이후부터 아이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채기 시작한 거죠.

학생부장 교사는 송 교사를 부안교육지원청 등에 신고한 이후에도 억울함을 호소하는 고인에게 비아냥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그는 왜 사실 확인도 없이 자신을 신고하느냐는 남편의 항의에 ‘검찰 가서 조사받고 죄가 없으면 풀려나면 될 것 아니냐’고 도리어 남편을 비웃었습니다.

첫날 내려진 격리조치는 이후 4개월가량 계속됐다. 아이들과의 격리는 곧 선생들과의 단절로도 이어졌다. 이러한 고립이 송 교사를 더욱 위축시켰음은 물론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학생인권교육센터와 교육청은 사건 첫날부터 남편을 고립시키는 데 개입했습니다. 학교담당 장학사한테 송 교사를 격리시키라고 한 후 곧바로 수업 중에 퇴출되었고, 3일간 출근정지 처분이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출근정지가 끝나자마자 직위해제 조치가 떨어졌습니다. 부안 교육지원청에서 전북교육청 인성건강과 학생인권교육센터가 격리시키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해가 안 되는 일 투성입니다.

송 교사에게 떨어진 직위해제 조치는 공식적으로는 7월 25일 화요일에 해제됐지만 송 교사는 여전히 교육현장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고 한다. 남편에게 비공식적인 제재와 낙인이 계속 이어졌다는 것이다.

부안교육지원청은 남편으로 하여금 완전히 희망을 잃게 만들었고, 죽게 된 결정적 단초를 제공했습니다. 이미 사건이 경찰에 의해 (4월 21일: 인터뷰어 주) 일찌감치 내사종결이 되었음에도 ‘경찰이 (학생과의) 신체접촉이 있음을 확인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를 대며 학교에 가지 말고 학생과 교사들과 학부모와 동네주민까지도 만나지 말고 집에 있다가 전보발령을 낸 학교에 가서 징계를 받으라는 어이없는 요구를 했습니다. 40일 휴가서를 강제로 작성하게 했고, 전보발령 동의서에도 역시 강제로 사인을 하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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